통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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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고구려의 발원지로 길림성 동남부에 위치한 조선족 집거지역.
목차
정의
고구려의 발원지로 길림성 동남부에 위치한 조선족 집거지역.
내용

통화는 한민족에게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고토(故土)로 인식되는 역사도시이자 고구려 문화의 발원지이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를 비롯하여 고구려 전기의 산성인 환도산성(丸都山城),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고구려시대의 돌무지무덤인 장군총(將軍塚) 등이 시내의 집안(集安)에 밀집해있는데, 이곳에 있는 고구려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서간도의 중심지역인 통화는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곳이다. 특히 1869년(고종 6) 대기근 이후 많은 평안도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 이주하였는데, 청나라에서 봉금령을 폐지하자 본격화되었다. 1897년(광무 1)에 통화·환인·관전 등지로 이주한 사람은 이미 8,772호에 37,000여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벼농사가 가능한 파저강(또는 동가강)이라 불리던 혼강(渾江)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통화현의 조선인 이주민은 1912년에 10,275명에 달했다

또한, 1896년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제천 의병 계열 인물들이 평안도 지역을 경유하여 통화현 오도구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이 지역이 항일운동 기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인석을 따라 이주한 이들은 70∼80명에 이르렀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망명자는 더욱 늘어나 왕산 허위(許蔿, 1855∼1908)의 형 성산 허겸(許蒹, 1851∼1939)이 허위의 처와 자식 등 일가족을 거느리고 1912년에 통화현으로 망명했다. 본격적인 망명은 신민회 계통의 운동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신민회가 추진한 독립군 기지 건설사업과 관련하여 조직적으로 서간도로 망명했다. 1946년 2월 3일에는 독립군과 중국의 군대가 길림성 일대에 잔존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통화사건(通化事件)이 있었다.

명칭 유래

통화는 성경장군(盛京將軍)이 관할하는 봉천부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1877년(광서 3)에 치소가 설치되면서 통화라고 하였다. 통화에는 ‘길상기복(吉祥祈福)’과 ‘문치무공(文治武功)’의 뜻이 담겨 있다. ‘통지(通之)’은 ‘관통하다’라는 뜻이고, ‘화의(化意)’는 ‘교화하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인덕과 인정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황

통화시에는 2개의 직할시, 3개의 현, 3개의 현급시, 3개의 개발구, 그리고 60여 개의 촌이 있다. 길림성 동남부의 중심도시로 장백산산림구가 포함되어 있으며, 압록강 너머 북한과도 멀지 않다. 국가가 승인한 국경 개방도시의 하나로 변경의 길이는 약 203.5㎞에 달한다. 한족, 만주족, 조선족, 회족 등 22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통화시는 의약, 금 가공, 식품 등 3대 특화산업 외에 건재, 기계 제조, 철강, 농산물 가공, 관광산업 등 다방면의 산업적 가능성이 있는 도시이다. 중국 내에서 의료도시, 포도주의 도시, 인삼의 도시, 철강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삼 생산량은 전국의 40%에 달한다. 중국 최대의 화산호수와 화산동굴[雲霞洞]이 있어 국가급명승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통화현(通化縣)은 통화시의 직속 현으로 길림성의 장백산 남쪽에 위치하며 혼강의 중류에 있다. 현의 소재지는 쾌대무(快大茂)이다. 현내에는 금두조선족만족향(金斗朝鮮族滿族鄕)과 대천원만족조선족향(大泉源滿族朝鮮族鄕) 등 2개 민족향(民族鄕)이 있다.

참고문헌

『동북3성 방문안내서(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주선양대한민국총영사관, 2015)
『한국독립운동사: 해방과 건국을 향한 투쟁』(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조선족의 문화를 찾아서: 중국 동북삼성 조선족 민족향의 영상인류학적 기록』(강위원, 역사공간, 2008)
『신간도견문록』(박진관, 예문서원, 2007)
『중국 조선족 역사·문화 산책』(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한림대학교출판부, 2002)
通化市人民政府(th.jl.gov.cn)
집필자
신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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