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판교고분군은 성남 판교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체 사업부지 가운데 고분군이 확인된 지역은 16구역의 ‘가 · 나’지점과 19구역의 ‘가’지점에 해당한다. 16구역은 청계산 국사봉(해발 540m)의 능선 끝부분에 형성되어 있는 해발 55∼80m로 비교적 나지막한 구릉이다. '가'지점은 해발 78m의 야산으로 16구역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여건은 남사면에 비하여 북사면이 비교적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에 크고 작은 곡부가 형성되어 있다. 유구는 대부분 남사면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16구역 '가'지점에서는 백제 횡혈식 석실분 5기와 조선시대 주거지 1동, 그리고 조선시대~근세 분묘 45기 등 총 51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16구역 '나‘지점은 해발 70m의 야산으로 16구역의 동쪽에 위치한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2동, 백제 주거지 1동, 백제 횡혈식 석실분 4기, 고려시대 주거지(추정) 1동, 조선시대 건물지 1동, 근세분묘 57기, 가마 2기, 수혈유구 5기, 성격미상유구 6기 등 총 79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19구역은 청계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의 말단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야트막하게 연속된 3개의 능선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가’지점은 3개의 능선 중 서쪽에 발달한 능선이다. 지형은 해발 50~75m의 야트막한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부의 동서 양 측면에 작은 곡부가 형성되어 있다. 조사구역의 대부분이 남향한 사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반적으로 유구가 고루 분포한다.
19구역 ‘가’지점에서는 적석목관묘 1기, 횡혈식 석실분 3기, 석곽묘 6기, 추정 토기가마 1기, 조선시대 수혈주거지 3동, 소성유구 1기, 수혈유구 2기, 집석군 1기, 매납유물 4점, 근세 토광묘 16기, 회곽묘 3기 등 총 41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16구역(판교동)과 19구역(삼평동)에서 조사된 횡혈식 석실분은 현재 판교박물관에 이전 복원되어 있으며, 2012년 성남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리중이다. 16구역 ‘가’지점에서 확인된 횡혈식 석실분은 동쪽 구릉에서 2기, 서쪽 구릉에서 3기 모두 5기가 조사되어, ‘나’지점의 석실분을 포함하여 16구역에서는 모두 9기의 횡혈식 석실분이 조사되었다. 횡혈식 석실분은 대부분 남사면이나 남동사면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63~74.1m 사이에 입지하고 있다. 모두 지하식으로 조성된 백제 석실분이다.
묘실의 평면형태는 등고선 방향과 직교하는 장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1·7·9호는 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축조되었다. 규모는 길이 280∼318㎝이며, 너비 166∼240㎝ 정도 된다. 묘실 내부 면적은 4.76㎡~7.44㎡이다.
묘실의 벽석은 부분적으로 치석된 판석형 할석을 사용하여 축조한 반면, 5·6호 석실분은 일부 치석된 할석들을 사용하여 벽을 축조하였다. 벽석 축조 수법은 양 장벽이 팽만하게 부풀리는 동장수법(胴張手法)을 사용하였으나, 5호 ·6호 ·9호 석실분은 비교적 직선에 가깝게 축조되었다. 4호 석실분을 제외한 나머지 8기의 석실분은 네 벽 중 북벽은 바닥면에서 약 1m 정도는 수직으로 축조하다가 그 위부터는 내경하도록 축조되었다. 그리고 8호 석실분의 경우는 동벽이 바닥면에서 약 1m 가량 수직으로 일정하게 축조해가다가 그 위부터는 약 130∼140° 정도 내경하도록 축조하였다. 이러한 축조양상으로 보아 천정은 궁륭식으로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묘실 바닥면에 아무런 시설을 설치하지 않아 피장자를 안치한 매장주체시설을 생토면에 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매장주체시설은 관정의 출토 예로 보아 목관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관정은 출토위치와 출토양으로 보아 피장자는 2인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부분 무질서하게 노출되어 목관의 크기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7호 석실분에서 비교적 정연하게 출토되었다. 이를 근거로 목관의 크기를 추정해 보면 길이 214∼257㎝, 너비 57∼67㎝ 정도로 판단된다.
연도부는 9기 모두에서 확인되며, 남벽의 우측에 마련된 우측편도이다. 연도부 개석은 ‘가’지점에서 확인된 5기에서 모두 확인되었다. 개석은 동벽의 남쪽부분과 남벽을 약 100cm 정도 쌓은 후 그 위에 대형의 할석으로 덮었다. 개석은 잔존하는 양상으로 보아 3매로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도 내부는 할석을 4∼6단 정도 쌓아 폐쇄하였다. 또한 바닥면은 대부분 경사면을 이루도록 굴착하였으나, 8·9호 석실분은 편평하게 처리하였다.
유물은 토기류와 장신구류, 그리고 목관에 사용되었던 다수의 관정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9호 석실분을 제외한 8기에서 모두 출토되었으며, 기종은 단경호, 직구호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고배와 완 등이 소수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중 주목되는 것은 장신구류로 1, 3, 6, 7, 9호 석실분에서 출토되었다. 대부분 은제 팔찌, 뒤꽂이 등이며, 1·9호 석실분에서는 금(청)동제의 뒤꽂이가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19구역에서 조사된 석실분의 경우 축조양상을 볼 때 16구역에서 확인된 석실분과 축조방식에서 상당한 차이점이 확인된다. 출토유물이 없고, 철제 유물은 교란층에서 출토되어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용인 보정동, 춘천 신매리 · 방동리, 연천의 신답리 유적에서 확인된 유구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주목된다.
16구역에서 조사된 9기의 석실분은 입구인 연도가 우측에 붙은 점, 동장수법으로 벽석을 올린 것, 변형궁륭형 천장 등이 공통적인 특징으로 한성백제기의 묘제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19구역에서 발굴된 2기의 석실분은 축조방식이 고구려의 전통적인 모줄임천장 양식과 쌍실분으로 구안되었다. 특히 1호분의 천장의 구조는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고구려 고분군과 비슷하며, 2호분에서 보이는 좌편재 관대는 화성시 동탄면 청계면 고구려 석실분과 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