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달천유적은 토양복원 및 학교조성부지로 개발 계획을 세우면서 3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대상지는 북서쪽의 천마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구릉 말단부에 해당하며 해발고도 67m 내외이다. 1차 발굴조사는 2006년 6월 12일~8월 31일까지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삼한시대 주거지 2동, 석관묘 1기, 구 1기, 수혈유구 4기를 확인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채광유구 및 이와 관련된 삼한시대 취락이 확인되면서 유적의 중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서는 학교부지에 대하여 당초 계획보다 축소하여 건립하고 나머지는 원형보존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2007년 4월 30일~5월 22일까지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1동, 삼한시대 수혈 11기 등 총 12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이후 원형보존이 결정된 부지에 대한 중금속 오염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발굴조사를 실시한 다음 토양복원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3차 발굴조사는 2008년 2월 20일부터 11월 17일까지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6동, 수혈 6기, 삼한시대 주거지 7동, 수혈 27기, 굴립주 1기, 환호 1기, 목책열 1기, 삼한 · 조선시대 채광유구, 근대 채광관련 선로 등 총 53기가 확인되었다.
울산달천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근대까지 다양한 유구가 조성된 복합유적이다. 특히 전기의 세장방형 주거지는 초석을 설치한 대형 주거지로 취락의 구조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삼한시대 환호취락은 해발 6166m 선상에 걸쳐 조영되었다. 구릉의 정상부를 따라 호상의 형태로 일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환호의 내측으로 5m 떨어진 곳에 구와 2열의 목책 열이 환호와 나란한 방향으로 돌아간다. 주거지와 수혈은 환호 내부에 분포하며, 채광과 관련된 유구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채광유구는 평면형태 원형에 가까우며, 지름 1.21.5m, 깊이 4m 정도이다. 당시 채광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삼한시대 수혈과 환호에서 미생토기(彌生土器), 낙랑토기(樂浪土器)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울산지역의 국제성을 알 수 있다.
달천유적에서 북서쪽으로 1.45㎞ 정도 떨어진 곳은 농공단지 조성계획에 따라 1998년 3월 울산대학교박물관과 부산대학교고고학과가 합동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삼국시대 탄요 3기, 기와가마 1기, 고려시대 이후의 토광묘 9기, 묘막지 3기 등이 확인되었다. 탄요는 전면작업장, 연소실, 소성실, 연도, 측구, 측면작업장을 갖추었으며, 제철과 관련된다. 울산에서는 달천유적 인근의 상안동유적, 매곡동유적, 중산동 약수유적, 호계동 28-1유적 등 반경 2㎞ 범위에 탄요가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이들 유적에서 생산된 목탄은 달천유적과 중산동 이화유적, 중산동 798-2유적, 매곡동유적 Ⅰ지구의 제철과 관련된 유구에 공급된 것으로 판단된다.
달천철장은 『세종실록지리지』에 1452년 달천에서 생산된 철 12,500근을 수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울산광역시 북구 일대에는 쇠곡, 쇠부리터 등 철과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도 많다. 달천유적 주변의 표토에서는 오랜 시간동안 퇴적되어 온 소철괴상의 철광석이 다량 산재해 있다. 삼한 · 삼국시대에 철광석을 이용했다면 노두의 철광석을 채굴하였거나 지표에 산재한 철광석을 수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채광유구는 철광석의 암반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무른 토양 속에 존재하였던 토철을 채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철광석 채광과 관련된 연구는 앞으로 더욱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지만 제철이 이루어진 시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