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부산간 고속도로 건설공사(7공구)에 앞서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유적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2001년 12월 19일부터 2002년 12월 24일까지 실시하였다. 밀양 살내유적은 밀양강의 중류 동쪽 범람원에 입지한다. 범람원은 자연제방과 배후습지로 나누어지며, 배후습지의 동쪽은 산지에서 공급된 퇴적물로 인해 선상지(扇狀地)가 형성되어 있다. 범람원의 지층은 자갈층과 모래층으로 되어 있으며, 청동기시대 유구는 미세한 모래층이 쌓인 자연제방(自然堤防) 위에 형성되어 있다. 발굴조사된 유구는 신석기시대 수혈 14기, 집석유구 9기, 유물산포지, 청동기시대 주거지 24동, 수혈 7기, 구 3기, 집석유구 1기, 석관묘 2기, 적석제단 2기, 지석묘 상석 11기, 밭 터 2개 층, 삼국시대 구(溝) 1기 등이다.
신석기시대 수혈은 평면이 모두 원형이며, 규모는 지름 1m 이내이고 깊이도 얕은 편이다. 이 중 11호는 토기 폐기장, 13호는 야외노지로 추정된다. 집석유구는 평면이 타원형 내지는 원형을 띤다. 특히 1~7호는 지름 1m 내외의 소형이며, 붉게 피열된 흔적이 확인되기 때문에 야외에서 조리를 하기 위한 노지로 판단된다. 당시 문화층 상면에서는 다량의 토기 편과 석기, 석재 등이 확인된다. 이러한 유물산포지는 당시 야외 생활공간에 남겨진 유물로 보이며, 인근에서 생산, 소비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는 심발, 호, 완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의 문양은 단사집선문(短斜集線文)이 압도적으로 많다. 자돌문(刺突文), 압인문(押印文), 침선문(沈線文)은 소량 확인된다. 목탄시료의 연대 측정 결과 신석기시대 중기 전반경으로 나왔다. 석기는 대부분 타제품(打製品)이며, 마제품(磨製品)은 소량 출토되었다. 굴지구, 석부, 찍개, 편인석부, 횡장석도, 소형석도, 완형석도, 지르개, 갈판, 갈돌, 지석, 새기개, 뚜르개, 석겸, 석창, 박편석기, 미완성석기, 몸돌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유구는 모두 3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된다. 가장 하층은 청동기시대 전기, 중층은 청동기시대 후기, 상층은 청동기시대 후기~삼국시대에 해당한다. 하층과 중층의 문화층은 높이 차이가 없이 거의 같은 면에서 확인된다. 하층과 중층 문화층 상부에 홍수 범람에 의한 퇴적층이 확인되며, 그 위에서 상층 문화층이 확인된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유구는 장방형주거지 10동이 조사되었다.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600∼1,940㎝, 너비 400∼790㎝의 중·대형으로 위석식(圍石式)과 무시설(無施設) 노지, 주혈, 초석(礎石)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이중구연토기(二重口緣土器), 마제석촉(磨製石鏃), 적색마연토기(塗磨硏土器), 장주형석도(長舟形石刀), 합인석부(蛤刃石斧), 갈판, 그물추, 관옥(管玉)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후기의 유구는 방형·원형의 주거지 14동과 수혈, 구, 석관묘가 조사되었다. 평면 방형 주거지는 길이 440∼564㎝, 너비 434∼538㎝의 중형으로 노지가 확인되지 않는다. 유물은 무문토기(無文土器), 적색마연토기, 석창(石槍), 어형석도(魚形石刀) 등이 출토되었다. 평면 원형 주거지는 중앙에 타원형 수혈과 외곽에 주혈을 갖춘 송국리형(松菊里型)으로 지름 500㎝ 내외이다. 유물은 무문토기, 반월형석도, 어망추, 석착(石鑿), 돌보습 등이 출토되었다. 석관묘는 주거지가 군집된 동쪽에 강의 흐름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벽석은 판석을 세워쌓기하여 ‘ㅍ’자형으로 결합하였다. 벽석과 묘광(墓壙)사이에는 천석(川石)으로 보강하였다. 바닥은 3매의 판석을 깔았다. 유물은 단벽 밖에 별도의 부장공간을 마련하여 적색마연토기 1점을 부장하였다.
청동기시대 후기~삼국시대에 해당되는 유구는 밭과 적석제단이다. 밭은 조사지역 서쪽 중앙부에서만 확인되며, 조사구역 외곽으로 계속 확장된다. 밭은 상하 2개 층으로, 밭 터에서 출토된 유물은 없지만 동일 층위면에서 원형점토대토기가 출토되어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적석제단은 지석묘와 유사하다. 길이 970㎝, 너비 557㎝ 내외로 먼저 가장자리에 두께 5㎝ 내외의 판석을 깔았다. 그 위에 할석(割石)을 3∼4단 정도 쌓고 내부에는 할석과 강돌을 무질서하게 채웠다. 마제석검(磨製石劍)과 기하학문양(幾何學文樣)이 음각된 바위그림 2매가 확인되었다.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가 확인되지 않으며, 주거지의 가장자리에 배치된 점으로 보아 무덤이 아닌 제단(祭壇)으로 추정하였다. 주변에서 고인돌의 상석으로 판단되는 괴석들이 확인되므로 고인돌도 분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적석제단에 새겨진 암각화는 집단 전체의 제사나 의례행위와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암각화와 비교 분석을 통해 제작연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밀양 살내유적은 밀양강 유역에서 확인된 대규모의 선사유적으로 인접한 금천리유적과 함께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특히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 적석제단은 의례, 송국리형주거지는 재지문화와 외부문화의 교류관계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