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금조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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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북정동 금조총
양산 북정동 금조총
선사문화
유적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삼국시대의 앞트기식돌방무덤. 횡구식석실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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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삼국시대의 앞트기식돌방무덤. 횡구식석실분.
개설

해발 320m의 성황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저평한 구릉에 북정동고분군과 신기동고분군이 분포한다. 대형분은 능선의 정상을 따라 배치되어 있으며, 1920년 일본인에 의해 봉분 형태가 뚜렷한 18기에 대해 호수가 부여되었고 부부총(夫婦塚)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소형분은 주로 구릉 사면에 밀집되어 있다. 금조총(金鳥塚)은 북정동고분군에 속한 부부총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금제 새발[鳥足]이 1쌍 출토되어 금조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양산 북정동고분군과 신기동고분군 일부가 택지개발 계획에 포함되면서 1990년 4월 13일부터 9월 20일까지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금조총을 비롯한 50여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금조총은 택지개발로 인하여 사적 해제구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해제구역에서 제외시키고 복원 · 보존 조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금조총에서 출토된 유물 6건 40점은 2016년 11월 16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내용

금조총은 구릉의 사면에 위치한 소형분으로서 횡구식석실묘(橫口式石室墓)이다. 장축은 남동-북서로 등고선과 직교한다. 구조는 생토층을 굴착하여 축조한 지하식이다. 봉분은 대부분 유실되고 편평한 상태였으며, 남쪽은 경사져 있었다. 석실은 할석을 이용하여 남동쪽 단벽과 양쪽 장벽을 먼저 축조하고 그 사이에 입구쪽인 북서쪽 단벽을 쌓아올렸다. 입구는 하단을 4~5단으로 쌓고 상단 전체를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양쪽 장벽은 상단에서 약간 내경하도록 쌓고 남동쪽 단벽은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상면(床面)은 남동쪽 단벽 아래의 토기 부장 공간을 제외한 전면에 판석상의 석재를 2~3겹으로 깔았고 동남쪽 머리가 놓인 부분은 자갈을 덧깔았다. 개석(蓋石)은 장대석 7매를 횡가한 평천장(平天障)이다. 석실의 규모는 길이 280㎝, 너비 100㎝, 높이 120㎝이다.

금조총에서 주목되는 것은 추가장이다. 소형분이며, 출토유물에서 큰 시간 차이를 보이지 않고 거의 동일한 면에 유물이 부장되어 있어 선후를 구별하기 어렵다. 또한 봉토가 대부분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입구부분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추가장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은 대부분의 중요유물들이 상석 상부에서 출토되었으나 태환이식 한 쌍은 2~3겹으로 깔린 시상석 아래의 생토층에서 출토되었다. 그리고 동남쪽 단벽 아래에 놓인 일부 토기가 생토층 상면에 놓여 있었으며, 이 토기 위에 상석이 일부 깔리고 상석위에 다시 유물이 놓이는 등 2차에 걸친 유물의 배치 흔적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추가장으로 판단한다면 1차에 부장된 유물은 생토층 상면에 놓여 있었던 소문의 태환이식 한 쌍과 장경호 2점, 고배 4점이고 나머지는 모두 추가장시에 부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평면 장방형이다. 횡구식석실묘는 평면형태 장방형과 방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장방형은 위치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대부분 지하식이며, 주로 북쪽에 입구를 설치하여 단벽 전체를 이용하였다. 평면형태 방형보다 선행한다. 평면형태 방형은 지상식으로 입구가 남쪽이나 서쪽에 있으면서 단벽 중앙 또는 좌우측 일부를 이용하였다. 금조총은 평면형태 장방형에 해당한다. 유물은 시상대 중앙에서 은제과대(銀製銙帶), 그 옆에서 태환이식(太環耳飾) 1쌍, 동남쪽에서 금동관(金銅冠), 청동초두(靑銅鐎斗), 금제조족(金製鳥足) 1쌍이 출토되었다. 석실의 서남쪽 모서리 부근에는 유개고배, 대부완, 장경호, 대부장경호, 금제팔찌 1쌍이 부장되었다. 시상대 거의 전체에서 금제영락(金製瓔珞)珞), 청옥(靑玉), 곡옥(曲玉) 등 유리구슬이 깔려 있었고 그 아래에서 금제태환이식 1쌍이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제조족과 청동초두 뚜껑의 조형(鳥形) 꼭지는 모두 새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당초 이 고분은 북정동고분군 내에서 21호로 명명된 것인데 이 금제 새 발[鳥足]의 출토로 인하여 금조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소형분(小形墳)임에도 화려한 유물이 부장되어 있어 당시의 신분과 매장의례(埋葬儀禮)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고분이다. 금조총의 축조 시기는 6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며, 북정동고분군은 당시 양산천 일대를 경영했던 지배자집단의 묘역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양산금조총·부부총』(심봉근, 동아대학교박물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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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권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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