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당하리유적은 해발 223m인 태봉산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 중간에 형성되었다. 유적이 있는 구릉은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고, 구릉 서쪽 끝 일부에는 소규모 목장과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남북으로 구릉들 사이의 곡간 지대는 계단식으로 논이 조성되어 있으며, 구릉 하단에는 폭 1~2m의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숭실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1997년 지표조사가 이루어졌고, 1998년 시굴조사를 하였으며 구릉 남사면에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어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조사구역은 당하리 Ⅰ 유적, 숭실대학교박물관 조사구역은 당하리 Ⅱ 유적으로 명명되었다. 남쪽에 당하리 Ⅰ 유적, 북쪽으로 250m 떨어진 지점에 당하리 Ⅱ 유적이 위치한다.
당하리 Ⅰ 유적은 발굴조사 결과 대소형 수혈과 주거지 1동, 다수의 주혈, 그리고 추정 저수지가 확인되었다. 이들 유구는 층위와 분포에서 서로 무관하지 않고 전체가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다. 당하리 Ⅰ 유적 수혈과 비교할 수 있는 김해 대성동 소성유적, 일본 하지끼 소성유구 또는 하지가마, 하지끼 쇼세이가마 등을 통하여 수혈의 성격을 토기생산 유적으로 판단하였다. 당하리유적을 토기생산유적이라고 규정할 때, 수혈의 생성 자체는 토기류를 제작하기 위한 원료 점토의 채취결과로, 저수지는 토기류를 제작하기 위해 사용되는 다량의 물을 저장하는 장소로, 주거지는 토기류를 성형 제작, 건조하는 공방지로, 목탄면이 남아 있는 수혈은 소성시설, 그리고 주혈은 원료 점토 채취단계나 건조 또는 소성 후 일시 보관소로 볼 수 있다.
당하리 Ⅰ 유적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Ⅰ기는 원삼국시대 토기복합체(중도양식)만 존재하고, Ⅱ기는 원삼국시대 토기복합체가 존속하면서 백제초기 토기복합체(한성양식)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Ⅰ기의 연대는 기원후 200년을 전후한 시기(2세기 후엽~3세기 전엽), Ⅱ기는 3세기 후엽을 하한으로 볼 수 있다.
당하리 Ⅱ 유적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당하리 16-21 일대에 위치한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주거지 1동, 저장고 5기, 성격 미상의 유구 3기, 조선시대 민묘 5기가 확인되었다. 당하리 Ⅱ 유적은 그 자체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태봉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규모 복합유적인 봉담유적군의 일부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의 성격과 잔존 양상을 보면 구릉 전체에 걸쳐 유적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