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길(閔丙吉)은 1884년 충청남도 아산(牙山)에서 태어났다. 호는 소운(蘇雲)이다.
민병길은 1923년 중국 난징〔南京〕으로 망명하여 1924~1925년경 중국 베이징〔北京〕 일대에서 다물단(多勿團) 단원으로 활동하며 친일파 응징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0월 베이징에서 민족유일당 조직을 위한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조직의 단합과 통일을 모색하였다.
윤기섭(尹琦燮) · 성주식(成周寔) · 신익희(申翼熙) · 연병호(延秉昊) · 최용덕(崔用德) · 김홍일(金弘一) · 염온동(廉溫東) 등과 함께 1929년에 난징에 모여 한국혁명당을 조직하였다. 또 이들과 함께 이른바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 도모, 무력투쟁을 목표로 하는 철혈단(鐵血團)을 창단하였다. 철혈단은 안재환(安載煥)을 단장으로 하여 김창화(金昌華) · 나월환(羅月煥) 등이 중견 단원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혁명당에서는 기관지 『우리 길』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일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민병길은 1933년 초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35년 지청천(池靑天, 이청천)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 간부로 활약하였다. 1936년에는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 김구(金九) · 차이석(車利錫) 등과 함께 항저우〔杭州〕에서 한국국민당을 새로 창당하여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중국 관내의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함께 미국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있는 대한독립단, 동지회(同志會), 국민회, 부인애국단단합회, 애국단 등과 연합하여 1937년 7월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1937년 10월에는 엄항섭(嚴恒燮) · 안공근(安恭根)과 함께 제29회 의정원 회의에서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상임위원회는 의정원 정기회의 휴회 기간을 임기로 하였다. 상임위원은 임기 중에 임시정부에서 제출한 각종 규정을 심의하고 재정결산안을 검사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정부를 따라 남부 여러 도시를 전전하였다. 1939년 5월에 임시정부는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으로 옮겨 갔다. 이곳은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重慶〕과 가까워 임시정부의 중국 관련 외교 활동에 유리한 곳이었다.
1939년 10월 초부터 12월 초까지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정원 의원에 재선출되었다. 이 회의에서 국무위원을 개선하고, 1939~1940년도 결산, 예산안을 심의하였다. 또 참모부 증설안을 동의 의결하였으며, 순국선열 공동기념일을 매해 11월 17일로 정하였다. 1942년 10월 19일 충칭에서 병사하였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