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사(高聲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천불산화엄사사적비(千佛山華嚴寺事蹟碑)」에 의하면 고려 후기인 1211년(희종 7)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21245)가 인근의 만덕산 백련사를 중창할 때 말사로 지었다고 전한다.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고성암'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호남읍지』에도 같은 이름이 있다. 1805년 강진군에 귀양 온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이 이 암자에 머물며 아암혜장(兒庵惠藏)과 교우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목조삼존불상이 조성되었다. 1933년에 지장탱화가 제작되었고, 이후 영산회상도와 감로탱화, 신중탱화가 봉안되었다. 맞배지붕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법당 왼쪽에 보은산방(寶恩山房)이, 오른쪽에 범종루와 요사(안심요)가 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동안 유배생활을 했는데, 처음에는 주막집에서 기거하였다. 1805년 봄에 승려 혜장(慧藏)을 알게 되면서부터 고성암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다산은 고성암 보은산방에서 큰아들 학연(學淵)과 함께 학문활동을 하며 약 1년간 거주하였다. 전하는 말에 옛 강진성터는 소가 누운 형국인데, 고성사의 위치가 소의 귀밑에 해당하므로 이곳에서 종을 쳐야 강진이 안정된다고 해서 절 이름을 고성사라 했다고 한다. 고암모종(高庵暮鐘: 해질녘 고성암의 종소리)으로 유명한 범종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이 지은 「강진고성암중종시주안서(康津高聲庵重鍾施主案序)」에 따르면 이 범종은 19세기에 교윤화상(敎允和尙)이 시주를 모아 주조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