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적암(隱寂庵)은 고려 후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 1270~1355)가 창건한 암자이다. 각진국사는 송광사(수선사)의 제13세 사주이다. 그는 강진의 월남사(月南寺)에 있다가 1330년경에 충숙왕의 부름을 받고 송광사의 사주로 부임하여 20년간 종풍을 떨쳤다. 은적암은 이 시기에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 암자는 존속하였다. 1771년(영조 47)에는 일관(一寬)과 선우(善祐)가, 1793년(정조 17)에는 벽담(碧潭)과 유오(有悟)가, 1896년(건양 1)에는 취암(翠岩)이 각각 공루(空樓)를 중수했다. 구한말에 의병을 소탕한다는 이유로 조계산의 많은 암자를 불태웠는데, 은적암 역시 이때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한편 1950년의 6·25 전쟁 때 폐사되었다고도 하는데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절터는 그 규모가 큰 편이며 석문이나 맷돌, 수각 등이 남아 있어 과거에 번창했던 암자였음을 추정케 한다. 수각 옆면에는 ‘화주 취암당 광무육년’ 이라는 명문이 있어 제작연대(1902)를 알 수 있다. 은적암은 본암인 보조암의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암(東庵)이라고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