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문연구회는 1946년 7월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국의 후원을 얻어, 조선 어문에 관심이 있는 몇몇 사람들이 발기하여 발족되었다. 이 단체는 해방 직후의 혼란한 우리 어문을 정리하고 지도 사업을 전개하면서, 철자법 교정, 강연회 개최, 출판 사업들을 계획하고 일부 실천에 옮겼다. 그러다가 조직 강화의 필요성을 느껴서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제175호로 개편되었다. 개편된 조선어문연구회는 김일성 대학에 본부를 두고 신구현이 위원장을 맡아서 문법, 철자법, 가로쓰기, 한자 처리 등 당면한 제 문제를 연구하였는데 『조선어 신철자법』(1948)의 초안 작성은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업이었다.
이후 북한 정권이 수립되어 1948년 10월 2일 열린 중앙 정부 제4차 각의에서 조선 어문의 통일과 발전을 위한 연구 사업 강화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제175호는 폐지되고 교육성 내에 조선어문연구회를 설치하고 전문 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각의에서는 조직 책임을 이극로 무임소상에게 위임하고 1949년 12월 말일까지 조선어 문법과 조선어 사전을 공간(公刊)할 것을 결정하였다.
북한 정부 수립과 함께 새로 발족한 조선어문연구회는 남북한 어학계의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주시경의 수제자로 3 · 1운동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하고 조선어문을 꾸준히 연구해 온 김두봉과 독일에서 유학하여 학문을 닦고 귀국해서는 조선어학회 대표자로 일제하에서 옥고를 치른 이극로를 비롯하여, 남북한 어문학계의 권위자들이 다수 참여하였다고 한다.
조선어문연구회가 당면한 과업은 ‘조선어 표준 문법의 제정, 조선어 사전의 편찬, 잡지의 발행과 출판 사업’ 등이었다. 첫째, 조선어 표준 문법 제정 사업은 남북한을 통틀어 아직 표준 문법의 제정을 보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표준 문법의 제정이 어문 통일의 기본이 되는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라 여겼다. 또한 이것을 제정하기 위하여 문법 편수부와 분과 위원회를 두고 연구 및 토의를 거듭하였다. 그 결과 1949년 12월 30일에 『조선어 문법』을 낼 수 있었다.
둘째, 조선어 사전의 편찬은 우리나라 문화사에 특기할 큰 사업이다. 다른 여러 나라들의 사전 편찬의 역사가 이것을 웅변으로 말하여 준다. 한 권의 사전을 만들어 내는 데 30∼40년의 긴 세월이 걸린 것을 보아도 능히 이것을 알 수 있다. 사전은 문화의 종합인 동시에 어문의 최고 법정(法廷)이라고 하였으며, 한 나라의 일체 문화가 그 가운데 압축되어 있고, 어문에 대한 일체의 의문 분쟁 해결을 이 사전에서 구하게 된다고 하였다. 조선어 사전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그 전제 조건으로 문법과 철자법,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 학술 용어 및 각 전문 용어 등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특히 일제가 남겨 놓은 일본식 용어 수정 문제 등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조선말사전』은 1950년 2월까지 편찬이 완료되었으며 1,500여 쪽에 달하는 사전에는 9만 3천여 어휘가 수록되었다.
셋째, 잡지의 발행과 출판 사업은 위의 두 가지 기본 사업을 보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월간 잡지들의 출판 사업을 병행하였으며, 연구자의 발표 기관이며 독자의 교양 자료인 월간 잡지 『조선어 연구』가 권위 있는 논문 강좌 등을 가득 싣고 다달이 발간되었으며, 논문집과 단행본도 때때로 나와 조선 어문 연구 사업의 결과를 보고하게 되었다. 이 사업의 결과로 1949년 4월에 『조선어 연구』가 창간되었으며, 또 『훈민정음역해』(전몽수 · 홍기문 역주)와 『실험도해조선어음성학』(리극로) 등이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