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건설붐은 1973년의 석유파동(石油波動) 이후 한국 건설업체들이 중동 국가들의 오일 달러를 벌기 위해 그 건설시장에 진출하여 수많은 공사를 수주하고 성공적으로 완수한 사건이다. 1973년의 제1차 석유파동 이후,사우디 등 중동 국가들이 풍부한 오일 달러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나섰는데 한국 건설업체들이 그 국가들의 도로, 항만, 주택, 플랜트 건설 시장에 적극 참여하여 수많은 공사를 수주하고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외화를 획득하고 인력 및 기술 개발과 국제 경영 노하우 획득, 국가 브랜드 상승의 성과를 거두었다.
1973년, 중동 전쟁(中東戰爭) 이후에 산유국(産油國)들의 담합으로 석윳값이 4배로 폭등하자 세계 경제에 불황(不況)이 닥치고 한국의 석유 수입 대금이 급증하여 경상수지(經常收支) 적자가 급증하여 외화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그 직전, 한 민간 건설사(삼환기업)가 사우디에서 164km의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수주한 일이 있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오일 달러가 풍부한 중동의 건설 시장에 진출키로 하고 여러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국 건설업체의 공사 이행을 은행이 보증하는 내용 등을 담은 「해외건설촉진법」을 제정하였고, 이 지원 덕분에 한국 건설업체의 중동 건설 수주가 활발해졌다.
중동 진출 초기에는 도로 공사를 주로 수주하였고, 이어서 그보다 난이도가 높은 항만 공사를 수주하였다. 특히 현대건설이 1976년에 당시 세계 최대 공사인 9억 4000만 달러 규모(당시 환율로 4500억 원 규모이며 한국 정부 1년 예산의 25%에 해당)의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여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갈수록 건축 공사도 많아져 건축 공사가 수주한 공사의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였고, 이어서 고난도의 플랜트(plant) 공사도 수주하였다.
해외 건설 수주액은 19651973년의 9년간 총 4억 2270만 달러였으나, 19741981년의 8년간 434억 6600만 달러였고, 중동 건설 수주액은 그 94%나 되었다. 같은 시기 중동 건설 수주액은 수출액의 절반 가까이에 달하여, 중동 건설 진출이 석유파동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 해외에 송출된 건설 인력도 급증하여 1979년에는 10만 명을 넘었고 1981~1983년간에는 매년 15만 명을 넘었다. 다만, 1977년의 사상 최초 경상수지 흑자와 같이 해외 부문의 통화 증발로 인플레가 생기고 인력이 부족해지는 사태로 인해 국내 노동 임금이 급등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중동 진출을 통하여 한국 건설 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중동 건설 현장에 수많은 근로자가 진출하여 기술을 익히고 재산도 일구어 돌아왔다. 무엇보다 한국 기업이 해외의 입찰에 도전하여 공사를 수주하고 악조건 속에서 건설 공사를 완공한 경험, 한국 근로자가 사막의 열사(熱沙)와 열풍을 이겨낸 경험은 현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