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야스공업은 신축성과 통기성이 좋은 편물로서 양말을 제조하는 공업으로서 일제하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한 대표적인 한국인 공업이다. 메리야스는 기계로 하나의 실로 짠, 신축성과 통기성이 좋은 천으로서 편물(編物)이라고 한다. 메리야스는 양말에서 기원하였으며 그 외에 내의, 스웨터, 털모자 등이 대표적인 제품이다. 한국의 메리야스공업은 1900년대 말 수동식 양말 직조로 시작하여 1920년대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한국인 공업으로서 발달하였다.
개항 후 외교관과 서양 선교사 등으로부터 양복과 구두, 양말 착용이 보급되었고 특히 1910년대 이후 한국인 사이에 고무신이 널리 보급되면서 양말 착용이 늘어났고, 이에 소상인이나 수공업자, 지식인 등이 수동양말기를 도입하여 양말 편조 기술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1900년대 후반에 경성과 평양에서 양말 편조업이 생겨났다. 1910년대까지는 경성을 포함한 경기도의 양말 생산량이 더 많았으나 1920년을 전후하여 평양의 양말 생산량이 더 많아졌다.
평양의 메리야스공업은 1920년대 중엽 저렴한 중국인 노동력을 사용하는 신의주 양말공업의 대두로 위기를 맞았는데, 평양의 업체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직공 임금을 대폭 낮추고 직공들의 저항을 억눌렀으며, 전동 직조기를 도입하여 생산을 높였다. 1930년 세계 공황의 도래로 메리야스공업은 타격을 입었으나, 1931년 만보산사건으로 인한 중국인 박해의 여파로 신의주 양말공업이 쇠퇴하였고 임금 인하와 더불어 대대적인 자동화를 단행함으로써 이 불황에서 벗어났다. 이후 메리야스공업계는 전반적인 호경기 속에서 생산을 확대하였고 메리야스 내의도 직조하여 양말공업에서 종합메리야스공업으로 성장하였다. 빈농가 출신으로 상점 점원을 거쳐 수동양말기 1대로 양말 직조를 시작했던 삼공(三共)양말의 손창윤(孫昌潤)은 2개의 양말공장에서 4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식민지 한국 제1의 메리야스공업주가 되었으며, 출연금 210만원의 재단법인을 세워 최초의 사립중등공업학교인 평안공업학교를 설립하였다. 평양의 메리야스공업은 전시통제기에도 대부분 경영을 유지하였다.
근대적 생활 물품의 하나로서 양말이 보급되자 평양에는 양말을 제조하는 한국인 기업이 다수 생겨나 전국 메리야스 생산 중심지가 되었다. 평양 메리야스공업자들은 변화하는 경영환경에 적극 대응하여 해당 공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해방 후 북한이 공산 치하에 들어가자 그 공장주들이 월남하여 한국 메리야스공업을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