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 제조업은 일제하에서 한국인의 신발로 널리 보급된 고무신을 제조하는 공업으로서 경성, 평양, 부산에 발달하였으며 한국인 비중이 컸던 산업이다. 수입 제품으로 국내 시장이 형성되자 국내 생산이 개시되어 수입품을 몰아냈으며, 부산에서는 일본인 업주의 비중이 컸으나 경성과 평양에서는 한국인 업주의 비중이 더 컸다. 전시통제기에도 최소한의 업체 존속은 보장되었고, 고무공업자들은 경영의 안정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고이윤까지 얻었다. 일제말에는 통고무신 외에 바닥만 고무인 면포화도 생산되었다.
전통적인 한국 민중의 신발인 짚신, 나막신, 삼신은 내구성, 활동성, 방수성 등에서 큰 문제가 있었다. 1910년대 말부터 일본산 수입 고무신으로 급속히 대체되자, 이 수요를 바탕으로 1920년대에는 조선에도 다수의 고무신 공장이 생겨나 고무신을 생산하였다. 고무신 공업은 경성과 평양, 부산 세 지역에 집중되었다. 불편한 재래 신발 대신 고무신이 보급되자 경성과 평양, 부산에서 국내 생산이 개시되어 일본산 이입제품을 몰아냈다. 경성에서는 1910년대에 조선인 신발 제조업자가 양화와 조선화를 절충한 경제화(經濟靴)를 생산하다가 고무신 제조로 넘어갔으며, 평양에서는 고무신 보급 이후 한국인 상인, 대금업자, 정미업자 등이 일본인 기술자나 일본 고무신 공장 직공 출신자를 고용하거나 그로부터 기술을 배워 고무신 제조에 나섰다. 부산에서는 1920년대 후반에 일본의 고무공장에서 기술을 익힌 한국인과 고무신 수입상 일본인이 고무신 제조를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 국내 고무신 소비량이 35배나 늘었다. 초기에는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 이입품이 시장을 차지하였으나, 국내 업체가 늘어나면서 생산이 빠르게 늘어 1920년대 말에는 이입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1930년대에는 1920년대의 과잉 투자 문제와 원료 가격 상승 문제가 더해져 고무신 제조업이 불황에 빠졌다. 고무공업자들은 만주로의 수출 등 시장 개척과 통고무신 대신 면포화 제조에 나섰고 임금 인하도 시도하였다. 과당 경쟁을 막기 위해 생산 통제도 논의되어 일본의 미쓰이 재벌이 부산 등 남부 지방의 14개 업체를 규합하여 대기업 ‘삼화고무(三和고무)’를 설립하였다. 여러 군소 업체들이 몰락 · 소멸하였으며 경쟁력 있는 업체들만 살아 남았다. 전시통제기에도 최소한의 업체 존속은 보장되었고, 고무공업자들은 경영의 안정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고이윤까지 얻었다. 한국인 기업이 일본인 기업과 업계를 양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