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1월 1일 울산시(현, 울산광역시)에서 강영수(姜泳壽, 1876-1919)와 이유송(李有松, 1887-1973)의 맏이로 출생하였다. 아래로 누이동생 금복과 소복이 있다. 부친 강영수는 조선 말기의 직업 군인으로 울산 병영의 부위(副尉)로 부임하여 병영 아전의 딸 이유송과 결혼하였다. 강영수는 1907년 군대 해산 후 실직하여 생활고를 겪고 처가살이를 하다가 1919년 사망하였고, 강정택 일가는 외가와 외삼촌 이종하(李鍾河, 1889-1978)에 의지하였다.
14살에 울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년 후에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며 교장의 권유에 따라 1927년 일본의 제1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처음엔 대구의 자산가인 장길상에게서 유학비를 지원받았으나,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격인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가문에게서 1940년까지 유학비와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당초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려 하였으나 시부사와 게이조〔渋沢敬三〕의 권유에 따라 조선의 현실을 고려해 1930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에 진학하여 농업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1933년 학부 졸업 후 농업 경제학과 연구 조수〔부수(副手)〕로 연구자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6년 후인 1939년부터는 4년간 전임 강사격인 조수(助手)로 근무하였다. 1943년부터는 농학부 연구원으로 위촉되었다. 연구자로서 조선 농촌의 현지 조사 활동에 주력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2월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경성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발령받았으나, 1946년 국립대학안 파동 때 사임하였다. 그 무렵 좌익계 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토지 문제 연구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8월 이승만 정부가 출범한 후 9월 조봉암의 요청에 따라 농림부 차관에 임명되었으나 1949년 2월 조봉암의 사임 이후 사직하였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체포되어 북한에 끌려갔으며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하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에 입각해 토지 문제와 농업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강정택은 농촌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 및 분석에 입각해 농업 경제의 개선 방향을 모색하는 농정학자였다.
1933년 농학부 졸업논문으로 「금융조합에 대하여」를 제출하였고 1939~41년에 「조선 농업의 생산시스템 분화」, 「조선식량문제의 전개과정」, 「조선 농촌의 인구배출 메커니즘」, 「조선의 공동노동 조직과 사적 변천」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