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회 ()

경제
인물
일제강점기, 목재업, 조선업 등의 사업을 통해 성공한 기업인.
이칭
개명
도요무라 유타카〔豊村裕〕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함경남도 풍산군
주요 경력
대인조선주식회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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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이종회는 일제강점기 목재업을 통해 성공한 기업인이다. 성공의 배경에는 조선총독부의 수력 발전 사업과 그 담당 주체였던 일본 재벌 일본질소〔日窒〕가 있었다. 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목재를 공급하는 데 수완을 발휘하여 급성장하였다. 30대 중반인 1940년경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청년 실업가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핵심 군수공업인 조선업에 뛰어들어 친일 기업가의 모습으로 보다 큰 성공을 위해 노력했지만, 패전으로 목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해방 후에도 기업 활동을 이어 나가지만 일제강점기 때 만큼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정의
일제강점기, 목재업, 조선업 등의 사업을 통해 성공한 기업인.
기업인으로 성장 계기

이종회(李鍾會)는 함경남도 풍산군(豊山郡) 출신이다. 기업가로서 성공의 발판이 되었던 것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추진한 수력 발전소 건설 사업이다. 일본 신흥 재벌 '일본질소'를 끌어들여 부전강(赴戰江)장진강(長津江)에 수력 발전소를 건설할 때, 수십만 원을 끌어모아 풍산읍 내에 공영상회(共榮商會)를 설립하여 토목용 목재를 공급하였다. 수완이 있어서 '일본질소'의 오너인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의 총애를 받았고 기업가로서의 발판을 구축하였다. 1940년경에는 자본금 150만 원의 동아합동목재(東亞合同木材), 동아광업(東亞鑛業)를 경영했고, 철 공업의 반도제작(半島製作), 건축 자재 제조 판매의 경인상사(京仁商事), 약품업의 공생제품판매(共生製品販賣)의 3개 회사에도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던 30대의 청년 실업가였다.

태평양 전쟁기 조선업 진출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는 인천의 일본인 경영 조선소(造船所)였던 대인조선주식회사(大仁造船株式會社)를 인수하여 조선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이 전쟁에 필요한 선박 건조(建造)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전시계획조선’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전시계획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건조할 선박의 규모를 정하고, 각 조선소가 국가로부터 목표량을 할당받아 정해진 기한 안에 건조하는 사업이었다. 필요한 기자재, 자금, 인력의 공급도 국가가 담당하였다. 전시 통제 경제가 작동하는 상황에서 기업가가 계속 기업 활동을 전개하여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전시계획조선'과 같은 군수(軍需) · 국책(國策) 사업에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이종회의 조선소 인수는 당연히 '전시계획조선'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이기에 전쟁 수행을 위한 핵심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일제에 보다 노골적인 충성심을 보여야 했다. 이에 이종희는 도요무라 유타카〔豊村裕〕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면서 친일 기업인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에 ‘경제인의 결전태세-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 함양’, ‘나의 증산(增産)의 변(辯) -직장에서 옥쇄정신(玉碎精神) 발휘’ 등의 기사를 도요무라 유타카의 이름으로 직접 기고하였다. 이런 모습으로 인해 그는 당시에도 '시국형 실업인'으로 불렸다. 이렇게 일제 군수 · 국책에 협조하여 조선업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보다 큰 기업가로의 성장을 노렸지만, 성공할 수는 없었다. 곧 패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인수한 대인조선은 본격적인 대량 선박 건조에 들어가지 못하고 설비 확장의 과정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기업 활동

이종회는 해방 후에도 기업가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지만 일제강점기 때만큼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고 어느 시점에서 사라졌다.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그가 1950년대에도 대인조선을 계속 경영했으며, 대한조선공업협회의 대표를 역임하는 등 조선업계의 중심인물이었다는 것은 확인된다. 그러나 이후 그의 기업 활동과 행적은 찾을 수 없고, 대인조선 역시 사라졌다. 그가 일제강점기 때 성공과 경험을 발판으로 해방 후 더 크게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남북 분단으로 초기 자본 축적의 발판이었던 목재업의 사업 기반을 상실한 것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새로운 활로로 일본인이 두고 간 귀속 기업체 풍국제분(豊國製粉)의 관리인이 되어 해방 후 주목을 받은 제분업(製粉業)에 진출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회사 자금으로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에서 대부받은 3800만 원을 개인적으로 횡령한 혐의로 기소되면서 풍국제분 관리인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관리인으로 복귀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일제강점기 말 시국형 실업인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친일에 노력하며 얻은 성과물인 대인조선이 있었으나, 해방 후 남한에서는 경제성 없는 소형 조선소일 뿐이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배석만, 『한국조선산업사: 일제시기편』 (선인, 2014)

논문

배석만, 「일제 말 조선인자본가의 경영활동 분석: 白樂承과 李鍾會의 군수회사 경영을 중심으로」 (『경제사학』 45, 2008)

인터넷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친일파 관련 문헌(https://db.history.go.kr)
『동아일보』 (1947.4.26., 1947.5.4., 1948.1.21.)
『매일신보』 (1941.10.11., 1942.1.11., 1944.1.8.)
집필자
배석만(카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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