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 조성을 위한 논의의 시작은 1963년 1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경제인 협회 회원들이 함께했던 ‘경제 문제 간담회’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공산품을 생산하여 수출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는데, 이것은 이후 재일교포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여 공산품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방안으로 구체화되었고, 관련 단체로 ‘수출 산업 촉진 위원회’ 가 설립되었다. 수출 산업 촉진 위원회는 1963년 3월, 재일교포들을 만나 국내 투자를 유치할 목적으로 실태 조사단을 일본에 파견하는데, 동 조사단이 만난 교포 기업가들은 공업 단지 건설을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수출 산업 촉진 위원회는 정부에 수출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재일교포들의 재산과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서울 근교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 산업 단지 조성을 건의했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수출 산업 공단 조성에 전면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정부의 움직임은 신속해서 1963년 8월 19일 무임소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수출 산업 공업 단지 육성 위원회’가 설치되어 입법 등 정부 지원 부분을 전담하게 되고, 10월에는 공업단지 조성의 실무를 담당할 ‘한국 수출 산업 공단’이 정식 출범하였다. 그리고 그 첫 사업으로 구로동에 제1단지 조성이 시작되었다.
공단 조성은 1965년 구로동의 1단지 공단 부지 조성을 시작으로 1973년 3단지까지 이어졌다. 1단지 기공식은 1965년 3월 12일 박정희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약 14만 평에 달하는 공단 부지는 공사 착공 2년 만인 1967년 4월에 준공되었다. 1967년 말까지 재일교포 기업을 포함하여 31개 업체가 입주하였다. 1단지 부지 공사가 거의 완료될 무렵인 1967년 2월 한국 수출 산업 공단은 제1단지와 인접한 가리봉동 일대에 12만 평을 추가로 조성하기로 결정하였고, 상공부 승인을 거쳐 1967년 10월에 착공하였다. 제2단지는 1968년 6월에 준공되었고, 국내 기업체 30여개가 입주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1·2단지에는 섬유, 봉제, 가발 등 경공업의 노동 집약적 업종이 가장 많이 입주하였다. 제3단지는 2단지 공사가 마무리된 1968년부터 기초 조사를 시작하였으나, 실제 기공은 자금난 및 토지 매입 지연 등으로 1970년 8월 시작되어 1973년 말에 완료되었다. 제3단지 부지는 제2단지 인근인 영등포구 가리봉동(현, 구로구 가리봉동)과 경기도 철산리(현,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일대 36만 평으로 1·2단지 면적을 합한 것보다 넓었다. 1973년말 분양이 완료된 시점에서의 입주 업체는 107개였다.
1960년대 경제 개발 오 개년 계획의 시행과 함께 건설된 한국 최초의 수도권 공업 단지이자 한국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는 최대 270개 업체가 입주하였고, 전체 수출의 10%를 점유하였다. 1988년 수출액 42억 달러로 성장의 정점을 찍었다. 1970년대 이후 중화학 공업화 정책이 추진되었지만, 노동 집약적 경공업이 중심이었고 섬유 · 봉제업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도 변함이 없었다. 당연히 노동자 밀집 지역이었고, 노동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1990년대 이후 저임금에 의존한 노동 집약적 제조업의 쇠퇴에 따라 공단의 모습도 변화하였다. 정부도 변화에 대응하여 제조 업종만 입주할 수 있었던 공단 지역의 기준을 완화하여 IT 관련 업종의 공단 입주가 가능하도록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런 변화에 따라 2000년,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구산업인 제조업과, 신산업인 첨단 지식 산업이 공존하는 모습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