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핵공장사업은 1970년대 초 정부가 군수 공업 육성을 위한 토대로써 중기계, 조선, 주물용 선철, 특수강의 4개 공장을 긴급하게 설립하려고 했던 사업이다. 그 배경은 1969년 미국 정부의 아시아 방위에 대한 방침 변화와 북한의 빈번한 무력 도발이 결합한 안보 위기 상황이었다. 사업 방식은 공장 건설의 경우 민간 기업을 선정하여 맡기고, 관련한 자금은 정부가 나서서 일본에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비협조로 계획은 차질을 빚었으나, 1973년부터 본격화되는 중화학공업화의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정부가 4대핵공장사업을 추진하게 된 직접적 배경은 1969년 7월 발표된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 때문이었다. 닉슨 독트린은 아시아의 국가들이 자국의 방위를 1차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안보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던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로 인해 매우 큰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대책 중 하나로 나온 것이 4대핵공장사업이다. 1968년,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시작으로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Pueblo號)의 북한 억류, 울진, 삼척 무장 공비 침투 등, 북한의 도발이 연이어 이어지면서 남북 관계가 극도의 긴장 상태로 돌입한 것도 또 하나의 배경이었다.
정부는 이른바 ‘자주국방(自主國防)’을 슬로건으로 하는 자체적인 군수공업(軍需工業) 육성을 당면 과제로 삼고, 그 토대가 되는 핵심 중공업 4개 분야의 공장 건설을 긴급하게 추진하였다. 사업 추진은 경제기획원이 직접 담당하였고, 구체적인 사업 계획서는 1969년 11월 미국 베텔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의 수석 연구원이었던 해리 최(Harry Choi) 박사의 주도 하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완성된 계획서는 1970년 6월 「기계공업 육성방안 용역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제출되었다. 정부는 이 사업계획서를 기반으로 ‘4대핵심공장 건설계획 작업팀(비밀특별작업반)’를 조직하여 사업 추진을 전담시키는 한편으로 해당 4개 공장을 건설하고 경영을 담당할 민간사업자를 선정하였다. 선정된 사업자는 주물선 강원산업, 특수강 대한중기, 중기계 한국기계, 조선 현대건설이었다.
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은 외자(外資) 5,900만 달러, 내자(內資) 4,260만 달러로 총 10,160만 달러였다. 자금 공급은 일본으로부터 차관(借款)을 들여와서 진행할 계획이었다. 4대핵공장사업에 들어갈 자금을 일본 차관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1970년 7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열리는 한일정기각료회의에 정식 의제로 올리고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자금 공급에 난색을 표했다. 한해 전인 1969년 포항제철 건설 때의 협조적 자세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공식적인’ 이유로, 저우언라이〔周思來〕의 4원칙을 내세우며 한국의 4대핵공장사업이 군수공업 육성의 일환이라 협조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비공식적’인 이유로써 일본의 지원과 협조를 통해 성장한 4대핵공장들이 일본 기업들과 국제 시장에서 경쟁하는 상황, 이른바 ‘부메랑 효과’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조선업계의 반발이 심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조선소 건설의 담당자인 현대건설의 개별적 접촉을 통한 지원 요청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한국 정부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4대핵공장사업이 군수공업 육성과 관련이 없음을 일본 측에 직접 표명하고, 일본 측이 ‘부메랑 효과’에 대한 우려로 가장 난색을 표했던 조선소 대신 신동공장(伸銅工場) 건설로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일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고, 결국 일본의 협조를 얻어 ‘신속하게 건설한다’는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1971년 한국 정부는 제5차 한일정기각료회의에서도 4대핵공장사업에 대한 협조를 일본 정부에 요청했지만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1972년이 되어서야 신동공장 건설을 담당한 풍산금속(豊山金屬)이 일본 미다니신동(〔三谷〕伸銅)과 제휴로 공장 건설에 들어간 정도였다.
4대핵공장사업은 안보 위기에 직면했다고 판단한 한국 정부가 매우 긴급하게 진행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관련 자금과 기술 등의 협조를 기대했던 일본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신속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중화학 공업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 사업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시간은 늦어졌지만, 정부와 해당 공장의 건설을 담당했던 기업들은 자금과 기술 공급선을 다른 쪽에서 찾는 등의 노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그 결과 주물선 공장은 1972년 강원산업 대신 포항제철이 맡아서 착공에 들어갔고, 중기계의 경우 한국기계공업이 미국 GM과 700만 달러 규모의 합작으로 불도저 등 각종 중기계를 연간 350대 생산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무엇보다 현대건설이 맡은 조선소는 유럽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1972년 울산에 조선소 건설을 시작하였다. 오늘날 세계 최대 조선소인 현대중공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4대핵공장사업의 경험과 이 성과를 바탕으로 정부는 1973년 중화학 공업화 선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중화학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