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완혁 ()

목차
관련 정보
경제
인물
한말부터 일제시기에 걸쳐 활동한 친일 기업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6년
사망 연도
1938년
본관
수원
출생지
서울
주요 경력
순무영 군관, 한성피복회사 사장, 대한천일은행 주주, 조선실업구락부 부회장, 한성은행 취체역회장,
대표 상훈
한국병합기념장,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조선통치 공로자 은배(銀杯)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백완혁은 한말부터 일제시기에 걸쳐 활동한 친일기업인이다. 1881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인으로 봉직하였으나, 갑오개혁 직후에 퇴직하고 기업가로 변신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일제 재정고문으로 들어온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화폐정리사업에 적극 협조하며 금융계의 거물로 성장하였다. 1906년부터 1918년까지 한호농공은행 은행장으로 재임하였다. 조진태(趙鎭泰), 조병택(趙秉澤)과 함께 ‘조선 실업계의 3원로’로 불렸다.

정의
한말부터 일제시기에 걸쳐 활동한 친일 기업인.
인적사항

185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81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고, 훈련원 판관, 군기시 첨정, 친군장위영 대관, 순무영 군관 등 무관으로 1894년까지 13년간 관직에 종사하였다. 1895년에는 한성피복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주요 활동

한성피복회사를 설립한지 2년 후인 1897년에는 마차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였고, 1900년에는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설립에 투자하여 주주가 되었다. 이후에도 조선 재계에서 활동 범위를 넓혀서 1906년에는 대한천일은행 이사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는 농공은행(農工銀行) 은행장에 취임하였는데, 동 은행이 1918년 설립된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에 통합될 때까지 12년간 은행장의 지위에 있었다. 무관에서 퇴직하여 기업인으로 변신한지 약 10년 만에 금융계를 중심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유력 경제인이 되었다.

무관이었던 그가 단기간에 재계의 유력 인물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이다. 특히 을사조약(乙巳條約)에 따른 일제 통감정치 하에서 재정 고문으로 들어온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화폐정리사업에 적극 협조하였고 그 공로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07년 메가타가 일본으로 귀국할 때에는 ‘메가타 남작 송별회’의 평의원을 맡았다. 1908년에는 식민지 국책기관의 상징이 된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의 설립위원으로 참여했고, 1909년에는 식민지 중앙은행이 될 조선은행(朝鮮銀行) 설립에도 관계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일진회가 ‘한일합방 청원’을 위해 일본에 가는 데도 동참하였다. 1912년 메이지〔明治〕 일본 왕이 사망했을 때도 조선 경성부 대표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조문했다.

친일의 강도에 비례하여 조선 재계에서 위상도 더 높아졌다. 1911년 경성 조선인상업회의소 회장에 취임하였고, 1912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그를 조진태(趙鎭泰), 조병택(趙秉澤)과 함께 ‘조선 실업계의 3원로’로 칭했다. 1920년에는 조선 재계를 대표하는 조선실업구락부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선입되었다. 1928년에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은행장으로 취임하여 1933년까지 재임하였다. 칙임관 대우 참의로 임명되어 1933년 사망할 때까지 직위를 유지하였다.

평가

백완혁이 관직을 떠난 직접적인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한 군부 관제 변화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관직에 있었을 때의 인맥과 정보를 이용하여 자본가로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피복 회사를 설립하고 기업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그는 피복 회사 경영 등 기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고, 조선 재계의 유력 인물로 부상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 (오미일, 푸른역사, 2014).
『제국과 상인』,(이승렬, 역사비평사, 2007).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인터넷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s://db.history.go.kr)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https://nl.go.kr/newspaper)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https://newslibrary.naver.com)
집필자
배석만(카이스트)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