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초반이었던 1895년 관직을 떠나 군부피복회사(軍部被服會社)를 설립하고 기업인으로 변신하였다. 오랜 관직 생활을 떠난 직접적 계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갑오개혁에 의한 군부의 관제 개혁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군부피복회사는 이름에서 보듯이 군부에 포목(布木)과 군복을 납품하는 회사이다. 공직 생활 동안 축적된 인맥과 전관(前官)의 특혜에 기댄 사업이었다. 사업은 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업가로서의 활동 폭도 점차 넓어졌다. 1897년, 새롭게 마차 회사 경영을 시작했고, 1899년에는 대한천일은행 설립에 참여하였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조선 재계의 대표 인물로 성장해 있었다. 특히 을사늑약으로 일제 통감정치가 시작되고 한국의 식민화 작업 수행을 위해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신망을 얻으면서 급성장하였다. 1905년 경성상업회의소 설립 발기인이었고, 이후 회장을 역임하였다. 1906년, 한성농공은행 설립위원, 1908년 한성은행 감사,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 그리고 이후 1925년까지 감사를 맡았다. 1909년에는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사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오면 친일 기업가로서의 모습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1907년 재정 고문 메가타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자 ‘메가타 남작 송별회’의 평의원(評議員)을 맡았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장례식에 경성상업회의소 대표로 참가했다. 1912년, 메이지[明治] 일본 왕이 사망했을 때도 상장(喪章)을 만들어 무료 배포하고, 한편으로 경성부 대표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조문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재계에서 위상은 더 높아졌다. 1912년 조선상업은행 은행장, 1916년 다이쇼[大正]실업친목회 발기인, 1918년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설립위원과 상담역, 1920년 조선일보사 초대 사장, 1921년 조선총독부 산업조사위원회 위원, 1926년 조선철도주식회사 이사가 되었다. 1927년에는 조선총독부 자문(諮問) 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로 임명되어 1933년 사망할 때까지 직위를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