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개시한 한국의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은 경공업 위주여서 산업 구조의 고도화가 필요했다. 또 1960년대 말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등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이 격화되었으나, 월남전 이후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지상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미국과 중국 간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는 한편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를 계획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미증유의 안보위기 속에서 북한을 압도할 수 있는 국력을 기르기 위해 중화학공업화를 핵심 수단으로 삼았다. 정부는 철강, 석유화학, 조선, 전자, 기계(자동차 포함) 등 가장 파급 효과가 크고 성공 가능성이 많은 업종 몇 개를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기로 하였다.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은 내수와 수출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는가는 업종별로 달리하였다. 선도산업으로서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조선과 전자공업은 저임금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수출 특화 산업으로 정의한 반면, 두 산업에 기초 소재를 공급하는 철강과 비철금속공업은 내수 충족에 우선을 두었다. 또 기술 수준이 낮은 기계공업도 수입 대체에 중점을 두었으며, 화학 산업 역시 향후 증가할 국내 수요를 자급 충족하는 데 우선을 두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은 내수 충족이든 수출 산업이든 모두 국제 경쟁이 가능하도록 최신 설비 기술을 도입하고 규모의 경제를 구현하도록 하였다. 특히 7~8년 내 100억 달러 수출이 가능하도록 ‘전산업의 수출화’가 목표가 되었다. “다른 나라는 공업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화학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수출도 하게 됐으나, 우리나라는 수출 목표를 먼저 수립해 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중화학공업화를 건설하게” 되었다(오원철 회고). 정부는 이를 위해 소수의 업체로 진입을 제한하였다. 정부는 규모의 경제를 구현하지 못한 1960년대의 정유, 비료공업이나 과당경쟁으로 업계가 공멸한 PVC 공업을 반면교사로 삼아, 독점기업 육성이란 비판을 감수하고 국제 경쟁력을 갖춘 공장을 건설하기로 하였다.
중화학공업육성계획에서 선정된 6개 업종은 그 후 한국의 주력 수출 산업으로 발전하였고 한국이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이 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초 중화학공업화 추진 당시의 한정된 재원과 기술력을 고려하면, 소수 업종과 그 해당 기업에 대한 집중 지원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