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최초의 조일통상수호조규에 관세 조항을 포함하지 않았으나, 이후 관세 주권이 침해당했음을 알고 관세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본과 재협상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새로운 조일통상장정과 함께, 수출입 품목별 관세율을 명시한 해관세칙을 체결하였다.
조선이 국제법상 최초로 체결한 통상 조약인 1877년 조일통상수호조규는 조선 관료의 무지로 인해 관세 조항을 포함하지 않았다. 뒤늦게 국제 통상 조약의 일반적 관례에 비추어 관세 주권이 침해되었음을 알게 된 조선 정부는 1878년에 동래부사에게 징세를 지시하였고, 동래부사는 두모진에 세관을 설치하고 관세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군대를 파견하여 협박하였으며 결국 무관세 상태가 유지되었다.
두모진 사건 이후 조선은 1880년 5월에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하고, 제2차로 1881년 11월에 조병호를 수신사로 파견하여 새로운 통상 조약과 관세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이 응하지 않았다. 조선이 1882년 5월의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관세 조항을 포함시킴으로써 관세 주권을 인정받자 더 이상 무관세를 고집할 수 없게 된 일본은 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에게 새로운 통상 조약과 관세 교섭에 나서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조미통상조약과 동일한 관세율을 주장하고 일본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여의치 않았다. 1882년 말에 리훙장의 추천으로 조선 해관 총세무사(總稅務司)로 내정된 묄렌도르프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으로 임명되었다. 묄렌도르프는 하나부사의 후임 다케조에(竹添進一郎)와 협상을 진행하여 마침내 1883년 7월에 전문 42조로 된 조일통상장정과 품목별 관세율을 명시한 해관세칙이 체결되었다.
해관세칙에는 수입세는 약재 및 식료 일용 잡화, 가구류 등이 5%, 양주, 시계, 장식품 보석류가 25%30%, 여타의 일반 품목이 810%이며, 수출세는 일체의 품목에 대해 종가의 5%였다. 이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관세율보다 낮았기 때문에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 중이던 영국과 독일이 관세율 인하를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1883년 5월에 조미통상조약, 11월에 조일통상조약이 발효되었다. 당시의 통상 조약에 포함된 최혜국 대우 조항에 따라 해관세칙의 세율은 일체의 대외 무역에 적용되었으며 이후에 발효된 조영조약의 세율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관세율은 해관세칙에서 정한 수준보다 더 인하되었다.
해관세칙에 의해 관세 주권을 회복함으로써 조일수호통상조규 이후 7년 동안 유지되었던 무관세 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세율 개정을 위해서는 일본은 물론 여러 무역 상대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므로 관세율을 자주적으로 개정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회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