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1974년에 한국나쇼날이 컬러텔레비전을 처음 생산했고, 1977년에는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1978년에는 대한전선이 컬러텔레비전 사업에 진입했다. 이처럼 컬러텔레비전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체제는 이미 구축되어 있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국민의 과소비를 조장하고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컬러텔레비전의 국내 방영에 계속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1979년에는 제2차 석유파동과 박정희 피살 사건의 여파로 한국 경제가 혼란에 휩싸였으며, 흑백텔레비전의 보급률이 90%를 넘어 텔레비전 내수 시장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한국의 전자 산업은 1970년대에 연평균 40% 정도로 급속히 성장하다가 1980년에는 13.1%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전자 산업의 몇몇 중견 기업들이 부도를 냈으며 그것은 중소 부품 업체들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졌다.
1980년에 들어서는 컬러텔레비전 방송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전자 업계도 설득 작전과 건의 활동을 계속 진행했다. 그러던 중 8월 1일에는 컬러텔레비전의 국내 시판이 허용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에는 주한미군방송(AFKN)이 컬러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는데, 시청자 대부분은 여전히 외제 수상기를 선호했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전자 업계는 컬러텔레비전 방영을 조기에 시행해 줄 것을 다시 건의했다. 상공부는 컬러텔레비전 방영이 국내 경제 발전에 가져다줄 효과를 집중적으로 부각했고, 한국전자공업진흥회는 컬러텔레비전 수상 방식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1980년 11월 10일에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12월 1일을 기해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다고 결정했다.
1980년 12월 1일 오전 10시 30분에 한국방송공사(KBS)는 수출의 날 기념식을 컬러로 방송했으며, 1981년 1월에는 텔레비전 방송프로그램의 80% 이상이 컬러로 전환되었다. 정부는 컬러텔레비전의 특별 소비세율을 40%에서 28%로 인하했고, 구매 가격의 80%까지 융자해 주는 소비자 금융 제도를 시행했으며,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취약한 25인치 이상 컬러텔레비전의 일본산 수입을 제한했다.
컬러텔레비전 방영은 한국 전자 산업의 재도약을 위한 획기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1981년에 전자 산업의 생산은 37억 9100만 달러, 수출은 22억 1800만 달러로 1980년에 비해 각각 33%와 11% 성장했다. 당시 컬러텔레비전 시장을 주도하던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새로운 모델의 개발과 출시에 박차를 가했다. 컬러텔레비전은 한국 전자 산업의 역사에서 소비자의 선호도와 취향에 따라 개발된 최초의 가전제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컬러텔레비전 방영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는 ‘컬러화’의 선풍이 불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소비 패턴의 고급화와 다양화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