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훈(洪坃)
1875년에는 지방의 부호와 사족(士族) 들에 죄를 씌워 재물을 빼앗고, 수많은 세납물을 갖가지 방법으로 횡령하고 함부로 징수하여 15만냥 이상을 축재, 경상도민의 원성이 높았다. 이에 부호군 이붕순(李鵬純)이 상소를 올려 처벌을 원하였으나, 왕과 민씨 척족의 비호를 받고, 오히려 이붕순이 무고를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해 울산에서 수령과 이서배(吏胥輩)의 혹심한 수탈로 농민이 봉기해 동헌을 습격하고 감옥을 파괴하자 울산부사 정홍대를 파직시켰는데, 이 사건이 일어난 책임을 물어 녹봉이 일부 감하여졌다. 1876년 경상도관찰사에서 물러난 뒤, 경상도암행어사 홍대중(洪大重)이 그의 혹독한 탐학과 공물(公物) 횡령을 보고함으로써 강진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 집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