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찬(閔泳瓚)
시강원 문학(文學)을 거쳐 1891년 7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1895년 명성황후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나섰으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귀국했다. 1896년 학부 협판으로 임명되어 한성은행 발기인, 육군 부령, 중추관 의원, 법부 협판, 고등재판소 판사, 프랑스 파리 만국박물회 한성본국박물사무 부원, 궁내부 협판, 사립 흥화학교 사무위원, 궁내부 특진관, 의정부 참찬, 학부 협판, 특명전권공사, 학부 서무대신사무, 주프랑스·주벨기에 특명전권공사로 활동했다. 1902년 주프랑스·주벨기에 한국공사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했다. 1903년에는 육군병상군인구호협정에 서명 조인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파견되었으며, 1903년 7월 적십자 위원, 이해 11월 주영·주미 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