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안국(尹安國)
그 후 공조정랑(工曹正郞)·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또한 천추사(千秋使)로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울산판관(蔚山判官)으로 나가서는 임진왜란에 당하였던 전화(戰禍)를 복구하니, 그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주었다. 윤안국은 마음 가짐이 개결하여 권문에는 출입하지 아니하였으며, 화복(禍福)에 연연하지 않고, 이이첨(李爾瞻)·기자헌(奇自獻) 등과는 절교하였다. 시(詩)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설초유고(雪樵遺稿)』 1책이 있다. 윤안국은 인조반정 이후 판결사, 예조참의, 동부승지, 좌부승지, 강원도관찰사, 병조참의, 상주목사를 거쳐 형조참의에 이르렀으며, 1629년 명에 사신으로 가던 도중 익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