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열(趙悅)
판도판서(版圖判書) 조천계(趙天啓)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전서(典書) 벼슬에 있던 어느 날 밤에 판서 성만용(成萬庸), 평리사(評理事) 변빈(卞贇), 박사 정몽주(鄭夢周), 전서 김성목(金成牧),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논하였는데, 이색이 말하기를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떠났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하여 결의가 되었다. 그 뒤 홍재지(洪載之)·이오(李午)와 더불어 함안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니 비가애영(悲歌哀詠)으로 세월을 보냈다. 1394년(태조 3) 왕이 공조전서를 제수하여 출사할 것을 종용하여 고사하지 못하고 한양궁(漢陽宮)에 들어갔는데, 태조가 탄금(彈琴) 한 곡조를 요구하니 “전왕(前王)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