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수(李昌壽)
교리·응교·집의·부교리·부응교·승지·황해수사, 우승지·영흥부사(永興府使)·경상우병사, 대사성을 거쳐 1754년 대사간에 올랐다. 1756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병으로 체직되었으며, 그 뒤 도승지·부제학, 이조참판, 판윤, 내의원제조·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61년 평안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우참찬·지경연,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763년 해남(海南)으로 귀양갔다가 곧 풀려났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다시 등용되어 판의금부사·한성판윤·예문관제학·형조 판서·수어사·내의원제조·홍문관제학·판돈녕부사를 두루 역임한 뒤, 1772년 마지막으로 수어사(守禦使)를 지냈다. 1778년(정조 2) 문헌(文憲)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