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장(子章). 충주 출신. 할아버지는 장령 권격(權格)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권상유(權尙游)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우윤 원만춘(元萬春)의 딸이다.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어 세마로 재직중, 1726년(영조 2)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되었다. 1727년 실록청낭관이 되어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정언으로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적의 세력을 과대평가하여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자는 주장을 적극 반대하여 좌절시켰다.
또한, 난이 일어났을 때 관찰사로서 신속히 대처하지 못한 권첨(權詹)을 본가가 있는 도에 충군(充軍)한 것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극변(極邊)에 충군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부수찬·교리를 거쳐 이듬해 다시 부수찬이 되어 실각한 소론(少論)을 비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당론에 치우친다 하여 삭직되었다. 곧 부수찬에 복직되고 부교리·정의현감을 거쳐 수찬에 재직중, 1732년 당론에 치우쳐서 주장하다가 해남에 정배되었다.
1734년 석방되어 헌납·용강현령·이조좌랑·필선·응교를 역임하였다. 1737년 사간과 승지 등을 거쳐, 1741년 대사간이 되었다. 1744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도내 영문 소재 군기(軍器)를 수리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옮겨 관동(關東)의 공삼(貢蔘)의 폐단을 논하고, 도내 속전(續田) 2,200결을 나눠주어 공삼을 경작하게 해줄 것을 상소하였다.
1748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암행어사 김치인(金致仁)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다음해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의 천거로 대사헌에 등용되었다. 1752년 부제학을 거쳐 1755년에 호조참판, 이듬해 우부빈객·함경도관찰사·지돈녕 등을 지내고, 175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1796년(정조 20) 청백리가 되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