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서천군수와 부평부사를 역임하고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무신.
이칭
공근(公瑾)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2년(명종 7)
사망 연도
1598년(선조 31)
본관
의령(宜寧)
주요 관직
부평현감|나주목사
내용 요약

남유는 조선 후기 서천군수와 부평부사를 역임한 무신이다. 이후 평해군수, 도총부 경력, 용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모친상을 당하여 복상(服喪)하던 중 기복(起復)하여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막하(幕下)로 활동하였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서천군수와 부평부사를 역임하고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무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공근(公瑾)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내섬시 부정 남칭(南稱), 증조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남변(南忭)이다. 할아버지는 대사성과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남세건(南世健)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 남응룡(南應龍), 어머니는 이윤식(李允湜)의 딸이다. 전처 청주정씨는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장녀이고, 후처 전주류씨는 형조판서 류훈(柳塤)의 딸이다. 아들 남이흥(南以興)은 전주류씨와의 사이에서 얻었다.

주요 활동

1579년(선조 12) 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8년(선조 21)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평부사로 있었는데, 적을 막지 않고 도주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593년(선조 26) 평해군수로 전임되었고, 주1 경력(經歷)과 용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모친상을 당하여 주2하던 중 주3하여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그는 좌영장을 겸직하면서 나주 인근 바다에 접한 9읍의 병사들을 관할하였다. 남유는 정유재란이순신과 함께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이 쏜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주4에 책봉되었다. 노량 앞바다에 영조 · 정조대의 문신 서명선이 쓴 노량 전적 유허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가 파괴하였고, 1987년 충청남남도 당진 충장사에 복원하였다. 충장사는 1667년(현종 7)에 건립되었다. 남유와 그의 아들 남이흥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1636년(인조 14) 남유와 남이흥에게 내린 남씨양세충신정려(南氏兩世忠臣旌閭)가 있다.

충장사 경내에 있는 남유의 묘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충청남도 기념물이다. 이 밖에도 아들 남이흥과 며느리 하동정씨의 묘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기언 별집(記言 別集)』
『선조실록(宣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인터넷 자료

디지털당진문화대전(http://dangjin.grandculture.net/dangjin)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aks)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오위(五衛)의 군무(軍務)를 맡아보던 관아. 중앙의 최고 군사 기관이다.    우리말샘

주2

상중에 상복을 입음.    우리말샘

주3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벼슬을 하는 것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4

조선 1605년(선조 38) 임진왜란 때 공울 세운 9,060명에게 내려 준 공신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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