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사는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智異山)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경덕왕 당시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시기와 주체에 대한 2가지 설이 있으며 통일신라의 쌍탑 가람 양식을 보여준다. 신행선사가 북종선을 전파하였고, 최치원이 머물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사세가 이어져 탄연이 이곳에서 제자를 양성하였고, 최 씨 정권 때 혜심과 만종이 주지로 임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선종에 소속되어 17세기까지 이어졌으나 폐사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단속사는 통일신라에서 조선까지 종교 중심지일 뿐 아니라 지방 사회의 중심 사원으로 역할을 하였다.
단속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2가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삼국유사(三國遺事)』 「신충괘관(信忠掛冠)」조에 실려 있다. 748년(경덕왕 7)에 주1 이순(李純)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763년에 신충(信忠)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경덕왕 때 직장(直長) 이순이 일찍부터 발원하기를 나이 50세가 되면 출가하여 절을 짓겠다고 하였다. 748년, 마침 그의 나이가 50세가 되었으므로 조연(槽淵)의 작은 절을 주2 단속사라 하고, 스스로 삭발하여 주3을 공굉장로(孔宏長老)라 하였다 한다. 또, 763년에 신충이 두 친구와 관을 벗어 걸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왕이 2번이나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대왕의 복을 빌겠다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단속사지 동 · 서 삼층석탑이 원위치에 있으며,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어 8세기 중 · 후반에 건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쌍탑 주4의 형식이 경주를 떠나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또한 최초로 신라에 주5을 전한 신행선사(信行禪師)가 이곳에서 북종선을 전파하다가 779년(혜공왕 15)에 주6. 경내에는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어 813년(헌덕왕 5)에 세운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가 있었다. 그리고 최치원(崔致遠)의 독서당이 있었다. 그가 쓴 ‘廣濟嵒門(광제암문)’ 주7이 사찰 근처에 남아 있어 그도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화(神畫)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과 유적들은 통일신라 이의 불교 문화와 함께 신라 문화의 모습을 전해 준다.
고려시대에도 주8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1148년(의종 2)에 이 절에 들어와 1159년(의종 13)에 입적한 대감 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10701159)의 주9과 대감 국사비(大鑑 國師碑)가 있다. 이후 정혜결사의 제2세 사주인 진각 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이 1220년부터 4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최 씨 정권 2대 집권자인 최우(崔瑀)의 아들 최만종(崔萬宗)이 주10로 머무르기도 하였다. 1226년(고종 13)에는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을 이곳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고려 말의 강회백(姜淮伯)은 과거를 보기 전에 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손수 심었는데, 그 뒤에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 하였다. 사찰이 지역에서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은 사찰의 종파를 주11 양종으로 나누었는데, 단속사는 선종(禪宗)에 소속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단속사가 언급되고 있으며 문인들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하고 있어 17세기 초까지도 존속하였다. 그러나 언제 주12되었는지 그 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단속사지 동 · 서 삼층석탑과 경상남도 유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당간주만이 잔존하고 있었다. 절터 위에 민가가 있어 본존 정비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2014년부터 정비 계획을 수립하여 주민 이주 단지를 조성하였고, 2018년부터 2022년까지 4차에 걸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신라의 쌍탑식 가람은 금당(金堂)과 석탑을 중심으로 하며 북쪽에 강당과 동 · 서 건물지, 남쪽으로 중문을 건립하여 일렬 배치 형태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주13으로 사방을 둘러싸게 조성하여 중심 사역을 완성하였고, 중심 사역 주변으로는 승려들의 거주에 필요한 생활 시설이 들어서는 부속 사역이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