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전은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해 군량에 충당한 토지이다. 농사도 짓고 전쟁도 수행한다는 취지로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여 국방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고려 초기에 영토가 확정되면서 양계(兩界) 지역과 서해와 동해 연변, 국경 밖에 설치되었다. 고려후기 권문세족이 겸병하면서 점차 소멸되었는데, 조선 건국 이후 군자(軍資) 확보를 위해 다시 설치하였다. 그러나 민전의 침탈, 농민 강제동원 등 폐단이 발생하여 치폐(置廢)를 거듭했다. 임진왜란으로 토지가 황폐해지고 양안이 미비하여 본래의 성격은 사라지고 관청의 경비를 보충하는 관둔전으로 변화되었다.
농사도 짓고 전쟁도 수행한다는 취지 하에 부근의 한광지(閑曠地)를 개간, 경작해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함으로써 군량운반의 수고를 덜고 국방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관청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 설치한 토지도 둔전이라 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전자를 국둔전(國屯田), 후자를 관둔전(官屯田)이라 하여 서로 구별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둔토(屯土)라고도 하였다.
둔전은 중국 한나라에서 처음 설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통일기에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백제 땅에 설치해 장차 고구려를 경략하기 위한 재원으로 삼은 것이 처음이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의 『구당서』에 전할 뿐이며, 또한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둔전제가 고려 이전에도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존 기록으로는 고려시대에 처음 나타난다. 국둔전에 해당하는 둔전은 고려 초기부터 영토가 점차 확정되면서 설치되어 나갔다고 생각된다.
주로 양계(兩界) 지역, 서해도 연변, 동해 연변 등에 설치되었으며, 국경 밖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백성이 거주하는 지역에 설치되기도 했지만, 전쟁이나 북진정책과 관련해 점령지나 영토확장지역에 축성(築城) · 설진(設鎭) · 사민(徙民)의 과정을 거쳐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 둔전은 군인을 직접 사역시켜 경작하는 경우와 둔전군(屯田軍)이라는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어 수확량의 4분의 1 정도를 수취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또한 둔전사라는 기구를 두어 관리를 담당하게 하였다.
관둔전에 해당하는 둔전은 1099년(숙종 4)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규모는 관청의 크기에 관계없이 5결이었다. 지방관청에는 이미 공해전(公廨田)이 분급되어 있었지만 부족한 경비의 보충과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한 숙종대의 재정강화정책으로 일반 주현의 둔전 경작이 허락된 것이다.
이 둔전은 국둔전과는 달리, 각 관청에 소속된 관노비의 노동력으로 개간, 경작되는 관청소유지였으며, 지방관인 수령이 관리, 운영하였다.
한편, 고려 후기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원나라가 설치한 둔전과 가호둔전(家戶屯田)이라는 것이 있었다. 원나라는 고려를 침략하는 동안에 일시적으로 둔전을 두었으며, 고려가 출륙환도한 직후인 1271년(원종 12)에도 일본 원정을 위한 발판으로서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고, 그들의 영토로 편입된 황주(黃州) · 봉주(鳳州)에 둔전을 설치하였다.
이때 원나라는 약 5천명의 군사도 파견했는데, 이 때문에 고려는 농우(農牛) · 농기(農器) · 종자 · 식량 · 말먹이 등을 공급해야 했으므로 부담이 아주 컸다. 그 뒤 고려의 끈질긴 교섭과 요구에 의해 1278년(충렬왕 4) 둔전군이 철수하고 둔전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충선왕 때부터 실시된 가호둔전은 이전의 둔전제가 쇠퇴하고 국가의 재정수요가 증가된 상황이었으므로, 토지는 지급하지 않고 다만 종자만 각 가호에 분급해 몇 배에 해당하는 둔조(屯租)를 수취하는 제도였다.
둔조는 풍흉에 관계없이 수취되었으므로, 가호둔전은 둔전의 이름을 빌린 것에 불과할 뿐 사실은 약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농민의 부담이 컸으므로 1375년(우왕 1)에 폐지했으나 근절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는 둔전제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고, 경작자인 수졸(戍卒)은 과중한 부담으로 도망하게 되고, 일반농민도 둔전경작에 사역되거나 가호둔전의 피해를 받았다.
더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둔전 자체의 소멸이었다. 농장의 발달, 토지겸병의 성행이라는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둔전이 권세가에게 겸병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공민왕 때에는 둔전관(屯田官)을 두어 겸병된 둔전을 복구하거나 새로운 둔전을 설치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결국 고려 말의 사회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건국주체세력들은 민폐의 하나인 둔전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태조 · 정종 때의 둔전문제 해결방향은 둔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둔전 경작에 농민의 부당한 사역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태조 연간에는 일단 모든 국둔전이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정종 때에 포진(浦鎭)의 군인에 의해 경작되는 둔수군(屯戍軍) 둔전만이 복설되었다. 따라서 태종 이전에는 둔수군 둔전과 관둔전만이 남고 모두 혁파되었다.
그러나 점차 국방문제가 제기되고 그에 따른 군자(軍資)의 확보가 요구됨으로써 국둔전이 다시 설치되었는데, 설치 · 경작과정에서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해 치폐(置廢)를 거듭하였다.
그 폐단은 민전(民田)의 침탈, 농민 노동력의 강제동원이 주된 것이었다. 그런데 세조 때에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군사조직을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재편성하고, 중부 이북의 13곳에서만 설치, 운영되었던 국둔전을 전국에 걸쳐 대대적으로 개발하였다.
한편, 관둔전에서도 국둔전과 비슷한 폐단이 나타나 치폐를 거듭하다가 규모와 관노비만에 의한 경작을 규정함으로써 세조 이후에는 항구화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지방관청의 크기에 따라 5∼20결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치폐를 거듭한 뒤 세조 이후에는 국둔전 · 관둔전이 모두 설치, 운영됨으로써 조선의 둔전제는 제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둔전제는 제도의 확립과 동시에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었다.
첫째, 경영형태상의 문제이다. 조선 전기의 둔전은 국역체계(國役體系)에 의한 부역노동에 기초하고 있었다. 즉, 국둔전은 주로 진수군(鎭守軍)에 의해 경작되고 일부의 내륙지방에서만 공노비나 신역(身役)을 면제받은 농민에 의해 경작되었다. 관둔전은 관노비로 경작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소유지인 민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농번기에는 둔전경작에 동원됨으로써 민전경영에 큰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위의 노동력 동원이 어려울 경우에는 부근의 일반농민과 농우 · 농기를 징발되었다.
그리하여 경작자의 부담과 반발이 커지고, 둔전의 생산성이 둔화됨으로써 부역노동에 의한 둔전경영은 한계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러나 둔전으로부터의 수입은 재정의 중요한 일부분이었으므로, 국가의 처지에서는 둔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에 농민의 반발을 무마하고 둔전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실시된 것이 병작경영이었다. 농민으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고, 수확을 국가와 경작자가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15세기 후반 예종 이후에는 병작경영이 일반화되고, 땅이 넓고 인구가 적은 북방지역이나 노동력이 부족한 일부 지방에서만 부역노동이 행해짐으로써 서로 병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주 · 전호제의 발달, 군역(軍役)의 대역화(代役化) · 포납화(布納化)라는 시대상황과도 결부된 것이었다.
그러나 척박한 둔전은 농민이 병작하기를 꺼리게 되어 폐기된 것이 많아지고, 빈민에게 분급된 일부 둔전은 호세가(豪勢家)에게 빼앗겨 둔전경영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종 이후에는 국둔전에 대한 언급이 없어졌다.
둘째, 관둔전의 사점현상(私占現象)이었다. 관둔전은 지방관청의 소유지로서 규정된 액수가 있었지만, 수령은 불법적으로 일부를 권세가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따라 16세기에는 규정된 액수에 미달하거나 전혀 없는 관청도 있었다.
그러나 위법한 수령 · 권세가에 대한 왕의 미온적인 처벌태도, 형식적인 검열 · 추쇄조처로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웠다. 그리하여 정액 이외의 둔전 경작으로 관노비 ·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부족한 관둔전의 확보를 위한 민전 침탈만 반복되었다. 결국 권세가에 의한 토지집중과 세수감소, 국가지배체제의 약화만 가져왔다.
조선 전기의 둔전제는 16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영문둔전(營門屯田)과 아문둔전(衙門屯田)이 새로 나타나 조선 후기 둔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등 둔전의 성격 · 설치방법 · 경영형태도 변화한 것이다.
조선 전기의 군사제도인 오위제(五衛制)는 16세기 중엽 군역이 포납화함으로써 완전히 붕괴되고, 임진왜란 후에는 모병제(募兵制)가 실시되면서 여러 군영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토지의 황폐화와 양안(量案)의 미비로 국고가 비게 되어 신설된 영문의 재정은 물론이고 관청의 부족한 경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 · 아문둔전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둔전 본래의 성격은 사라지고 관청 경비를 보충하는 관둔전적인 의미가 강조되었으며, 설치기관도 주로 중앙의 관청이었다.
둔전의 설치방법도 다양화되었다. 그것은 각 영 · 아문과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무주진황지(無主陳荒地)의 개간지, 민전모입지(民田募入地, 또는 民田冒入地), 민전매득지(民田買得地), 적몰속공전절수지(籍沒屬公田折受地), 민전수조지(民田收租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을 소유권에 따라 분류하면 영 · 아문 소유지와 개인 소유지인 민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8세기 후반에는 전자의 유토둔전(有土屯田)과 후자의 무토둔전(無土屯田)으로 정리되었다.
이렇게 둔전의 설치방법이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경영형태도 여러 가지로 나타났으며, 영 · 아문이 폐지된 갑오경장 이후에는 많은 소유권분쟁이 발생하였다.
한편, 영 · 아문이 독립된 경제주체로서 활동함으로써 영 · 아문둔전의 설치 · 확대는 국가경제와 대립하게 되었다. 둔전의 수익은 영 · 아문으로 들어가고, 아울러 둔전민에게는 군포 · 환곡 등 모든 역(役)과 공부(公賦)가 면제되었기 때문에 피역(避役), 도부(逃賦)하려는 양인과 노비가 자신의 민전을 가지고 스스로 투속함으로써 국가세입과 군액이 감소하였다.
그리하여 영문을 폐지하고 군사통수권을 왕으로 이양하며, 둔전을 폐지해 군액을 증가시키자는 논의도 있었지만, 신설 둔전의 혁파나 정액 외 둔전의 면부출세(免賦出稅) 조처 등 미봉책에 그침으로써 둔전의 규모는 갈수록 증가하고 농민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여기에는 일단 설치된 관청은 혁파되기 어렵다는 행정조직상의 특성도 있지만, 각 영문의 영장의 재산이 삼공(三公)의 그것을 능가하고 둔전의 중간관리인이 둔조의 상당한 부분을 착복했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쉽게 폐지될 수 없었다. 18세기 초의 영 · 아문 둔전은 약 5만결로서 당시 전체 토지의 약 3.5%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경영에 있어서는 부역노동에 의한 경작은 사라지고, 각 둔전이 설치되는 특수성에 따라 영 · 아문의 소유지에서는 병작제가 행해지고, 민전에서는 10분의 1 정도가 수취되며, 나머지는 그 둔전의 소유권이 어디에 보다 많이 귀속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르게 결정되었다.
그러나 둔조는 일정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 · 아문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영 · 아문과 경작자의 역학관계에 의하여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일반 민전에서의 지주제에서와 같이 지주인 영 · 아문과 경작자는 둔전의 지대율과 지대형태를 둘러싸고 항상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영 · 아문의 수취강화와 이에 대한 경작자의 개별적 · 집단적인 저항은 반복되었다.
그런데 갑오경장 이후 둔토의 관리기구가 변화하고, 국가 · 왕실 · 일제에 의한 둔토의 지주경영이 더욱 강화됨으로써, 소유권분쟁과 경작민의 저항이 뒤따르게 되었다.
즉, 1894년 관제개혁으로 의정부 탁지아문에 이속된 둔토는 이듬해 궁내부와 탁지부로 분속된 뒤, 1899년 왕실재정의 강화라는 분위기에서 궁내부 내장원으로 이속되었다. 1907년 다시 탁지부로 이속되고, 이듬해에는 궁방전(宮房田) · 역토(驛土)와 함께 국유화됨으로써 일제 통감부 수중으로 들어갔다.
일제는 10년 동안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뒤 1920년부터 10년 동안 「역둔토특별처분령」에 의하여 둔토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반인에게 불하함으로써 둔토 · 둔전은 역사상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둔토의 관리기구는 변동했지만 지주로 된 국가 · 왕실 · 일제는 둔토에 대한 지주경영을 계속 강화해나갔다. 그것은 토지의 집중, 작인(作人)에 대한 파악강화, 지대인상에 의한 잉여생산물의 수취강화, 지대의 상품화 등으로 나타났다. 이를 위한 기초조사로서 1895년의 을미사판(乙未査辦)과 1900년의 광무사검(光武査檢), 그리고 일제에 의한 각종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내장원에 의한 광무사검과 일제의 역둔토조사에서는 과거에 단순히 둔토였다는 이유만으로 대부분을 국유지로 처리함으로써 사실상의 민전인 무토둔토에서 많은 소유권분쟁을 야기시켰다.
뿐만 아니라 둔토의 도전(賭錢) · 도조(賭租)는 점차 증가해 1920년대에는 민간의 소작료와 같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작인들은 납부거부 등을 통한 대지주 투쟁을 계속해나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