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보(聲甫), 호는 오헌(梧軒).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민시중(閔蓍重)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민진주(閔鎭周)이며, 어머니는 정상징(鄭尙徵)의 딸이다.
1710년(숙종 3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15년 주부(主簿)·정랑(正郞)에 올랐고, 신임사화 때 사직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정랑이 되고, 이듬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정랑·정언 등을 거쳐, 1726년 헌납(獻納)·사간이 되고, 이듬해 교리(校理)를 지냈다.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호서안무사(湖西安撫使) 김재로(金在魯)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군기를 엄정히 하는 등 공을 세워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그 뒤 충청도·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부제학·대사간·형조참판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33년 사은 겸 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듬해 대사성·대사헌이 되고,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737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당론(黨論)을 제기한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대사헌·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 이조판서, 1743년 예조판서·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다음 1746년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뒤에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관작(官爵) 추탈(追奪)을 상소하다 면직된 채 죽었다. 글씨로도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