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회백(晦伯), 호는 삼금당(三錦堂). 아버지는 민후경(閔後慶)이다.
신장이 9척이나 되고, 능히 5석의 활을 당겼다고 한다. 1705년(숙종 31)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거쳐, 1711년 통신사 조태억(趙泰億)·임수간(任守諫) 등을 따라 일본에 가다가 대마도(對馬島)에서 풍랑을 만나 위태롭게 되었을 때 혼자 일행을 구출하여 무사히 다녀온 뒤, 회령부사가 되었다.
1724년 전라병사를 거쳐 다음 해 통제사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국고를 탕진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으나, 영조의 신임으로 무사하였다.
같은 해 안성군수로 부임하여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아우 민제만(閔濟萬)과 함께 안성·죽산에서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분무일등원종공신에 훈록되었다. 이어 그해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그 이듬해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