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는 봉(횃불)과 수(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전근대 국가의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방법이었다. 높은 산에 올라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주로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으로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락국의 수로왕이 봉화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 연원이 깊다. 거화를 통한 통신 방법의 확정, 전국 차원의 봉수선로 설정, 시설 확충 및 요원 배치, 관장 기관의 설립 등 국가의 통신체계로 확실하게 정비된 시기는 고려 중엽이며 이 틀은 대부분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우편(新式郵便)과 전기통신이 창시되기 이전의 전근대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방법이었다.
역마(驛馬)나 인편(人便)보다 시간적으로 단축되었고, 신속한 효용성을 발휘하여 지방의 급변하는 민정상황이나 국경지방의 적의 동태를 상급기관인 중앙의 병조에 연락했다. 봉수제는 일반 국민들의 개인적인 의사표시나 서신을 전달할 수는 없는 것으로, 국가의 정치 · 군사적인 전보기능(傳報機能)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군사적인 목적에서 설치된 봉수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13세기)이다. 그러나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횃불과 연기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지혜는 일찍부터 발달하였을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는 이미 주나라시대부터 시작하여 전한(前漢)시대에 봉수가 있었다고 하며, 그것은 점점 발달하여 당나라시대에는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수로왕의 치세중에 이미 봉화를 사용하였다고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0년 조(條)의 ‘봉현(烽峴)’을 비롯하여 봉산(烽山) · 봉산성(烽山城)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수로왕이 유천간(留天干)을 시켜서 망산도(望山島) 앞바다에 나가 붉은 돛에 붉은 기를 단 배가 나타나면 봉화로써 통지하게 하라고 한 기록은 일반적 의미의 봉화임에 틀림이 없겠고, 『삼국사기』에 보이는 봉산성 등의 기록도 이미 봉수제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 이전에 이미 봉수제가 확실히 성립하였고, 당시 두 지역 사이의 문물교류로 미루어 군사적 의미의 봉수제는 실시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 고려 중엽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관계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의 봉수제 기원은 역제(驛制)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록상으로 우리나라 봉수제의 확실한 출발은 고려 중기로 보아야 한다. 고려시대의 봉수제는 삼국시대보다 월등히 발전하였다.
1149년(의종 3)에 봉수의 거화수(炬火數)를 규정하고, 봉수군(烽燧軍)에게 생활의 대책을 마련하여 주었고 감독책임자까지 배치한 사실이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曹晉若)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 나타난다.
의종 때에 와서야 비로소 봉수의 격식이 규정되었고, 야화(夜火)와 주연(晝烟)으로 구분하였으며, 적과 접근하고 있는 변경지역과 해안지방의 급변하는 정세(情勢)에 따라서 거화수를 정하였다.
평상시 부근의 주민들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는 1거(炬)를 하였고, 변방이 위급한 상황이라든가 사태의 추이가 험악하게 진전될 때 2거, 적이 침입하여 멀지 않아 전투가 시작되려고 할 때에는 3거, 적과 아군이 접전하여 전황(戰況)이 급박한 상황에는 4거를 거화(擧火)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약 20년 앞선 1123년(인종 1)에 송나라 사신 노윤적(路允迪)과 함께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그의 견문록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봉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송나라의 사신들이 배를 타고 흑산도(黑山島)에 도착하면 언제나 야간에는 항로의 주변에서 산정(山頂)에 있는 봉수소(烽燧所)의 불을 발견할 수 있었고, 봉화는 순차적으로 밝혀서 임금이 있는 왕성에까지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흑산도에서 왕성까지 봉수가 실시되었음은 물론 사신의 도착도 중앙에 보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역제가 고려 성종과 현종 대에 중앙집권과정에서 확립된 사실에 비추어, 봉수제도가 역제와 함께 고려의 성종∼현종 연간에 편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종 3년에 조진약의 상주(上奏)에 의하여 베풀어진 바는 뒷날 조선 세종 때에 이루어진 시책과 같이 이미 편성되어 있는 각 봉수에서 정세의 위급에 따라 올릴 횃불 수[炬數]와 봉수를 지킬 요원의 배치 및 그들에 대한 경제적 뒷받침 등을 정한 봉수식(烽燧式) 규정의 정비였다고 믿어진다.
이후 봉수제의 존속은 이규보(李奎報)의 작품 등에도 나타나지만 원나라의 침입과 그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고려시대의 봉수제는 무너지고 원군(元軍)에 의한 그들의 봉수조직이 구성된 듯하다. 고려의 봉수제는 그 뒤 원나라의 지배세력이 차차 후퇴할 무렵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지면서 다시 편성, 강화되어 갔다.
즉, 1351년(충정왕 3) 8월에 송악산(松嶽山)에 봉수소를 두었고 송악봉수에는 장교(將校) 2인, 부봉수(部烽燧)에는 장교 2인, 군인(軍人) 33인의 간수군(看守軍)이 배정되었다.
1357년(공민왕 6) 이후 고려가 망할 때까지 약 40년 동안 죄인을 봉졸(烽卒)로 하거나 주군(州郡)에 명하여 봉수를 삼감[謹烽燧]으로써 척후(斥候)를 엄히 하고 인접과의 상교(相交)를 신속히 하라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특히 1377년(우왕 3) 5월에는 강화(江華)로부터 위급을 알리는 봉화가 하루종일 잇따라 올라오므로 경성(京城)의 경계를 엄히 하였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통하여, 첫째로 고려시대에 보이는 봉수관계의 기록은 의종 3년 및 『고려도경』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거의 충정왕 이후의 봉수제 변천에 대한 큰 추세를 짐작할 만하다.
둘째로 고려 말에 이르러 왜구의 침습(侵襲)으로 인하여 봉수조직이 강화되었음은 왜구의 위협이 오히려 해소되지 않았던 조선 전기에 있어서의 봉수제의 편성과 그 강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새 왕조를 창건한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모든 문물제도에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이후, 개혁을 거듭하여 점점 확립하게 되었다. 봉수제 역시 고려시대의 것을 이어받았다.
특히 고려 말에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봉수제를 강화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에 이르러 이미 봉수제가 실시되고 있음을 기록을 통하여 확실히 알 수 있다.
1406년(태종 6) 12월에 자주인(慈州人) 조수일(曺守一) 등을 거제현(巨濟縣) 봉졸로 장배(杖配)하였다고 하고, 1408년 1월에는 연해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만호(萬戶)와 천호(千戶) 등을 단속할 목적으로 해도찰방(海道察訪)을 하삼도(下三道)에 보내면서, 봉화로써 해상을 간망함은 군사상 긴요하므로 만약 이를 소홀히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엄중히 다루라고 지시한 바가 있다.
그 뒤 봉수제는 세종 때에 이르러 종래에 계승되어 온 고려의 봉수제를 바탕으로 하고 당나라의 제도를 크게 참고하여 거화거수(擧火炬數) 등 관계규식(關係規式)을 새로 정하며 제도연변(諸道沿邊)의 각 연대(烟臺)를 새로이 축조하고 나아가 봉수선로(烽燧線路)를 일제히 획정하는 등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19년(세종 1) 5월에 무사(無事) 때 1거(擧)로부터 적과 접전 때 5거(擧)에 이르는 거화법(擧火法)과 관계요원의 근무부실에 대한 과죄규정(科罪規定) 등을 정하였다.
1422년 8월에는 경상도수군도안무처치사(慶尙道水軍都安撫處置使)의 상계(上啓)를 받아들여 각 도의 봉수처(烽燧處)에 연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화기 등의 병기를 비치하여 주야로 간망하도록 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병조로 하여금 의정부 및 육조와 더불어 봉수를 정하게 하였다.
특히 『속육전(續六典)』의 편찬 때에 이르러 『당률(唐律)』과 『대명률(大明律)』 등을 참고로 관계규정을 강화한 것 같고, 다시 세종 때에 크게 이를 보충 · 개혁하는 한편 봉수대의 시설을 개선하고 전국적인 배치를 일신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1444년 10월에서 1445년 3월에 걸쳐 활발하게 논의된 봉수구폐책(烽燧救弊策)은 세종 초기에 일단 그 면모를 새롭게 한 고려 이래의 전통적 봉수제를 바탕으로 하고, 세종 중기 이후 약 20년간 계속된 야인(野人)과의 실전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봉수의 시설 · 관장 · 요원 및 그들에 대한 처벌 · 행상(行賞)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봉수망, 즉 경(京) · 내지(內地) · 연변(沿邊) 봉수를 유기적으로 정비한 일대개혁이었다.
이로써 조선왕조의 봉수제는 그 확립을 보았고, 나아가서 『경국대전』의 봉수조에 실린 규정의 원형을 이루었으며 그 전후에 획정된 봉수선로는 오늘날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수록된 내용으로 그 면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세조 때에 편찬된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 대본(大本)이 원칙적으로 준수되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봉수제는 1447년(세종 29) 무렵에 확립되고 『경국대전』의 규정으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전국적인 봉수조직이 편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실제 봉수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지는 못하였다.
그 까닭은 봉화군(烽火軍)의 고역(苦役)으로 인한 도산(逃散)과 근무태만, 시설의 미비, 요원배치의 불충분, 고독과 한랭에 시달리는 봉수군에 대한 보급의 부족, 그리고 자연조건, 즉 나무가 가리우고 구름과 바람 등의 장애로 후망(堠望)이 불가능하거나 중도에 봉화가 끊어진 데 있다.
성종 때에 이르러서 국가의 평안이 지속되고, 인심이 태만해지면서 경상도 남해현(南海縣) 적량(赤梁)에서 사변이 일어났으나 순천(順天) 돌산포(突山浦) 봉수는 평시의 예에 의거하여 1거만을 하였다.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 웅천(熊川)이 함락되어도 봉군은 거화하지 못하였고 1544년 4월 사량진(蛇梁鎭)에서 왜변이 일어났는데 허위로 봉화를 올렸기 때문에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봉수의 허설화(虛設化)는 법령의 해이와 더불어 더욱 극심하게 되어 을묘왜변이나 이탕개(尼蕩介)의 난, 임진왜란이 일어났어도 전혀 보고하지 않고 거화하지 않음으로써 봉수는 허구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파발제(擺撥制)가 등장하게 되었다.
봉수는 경비가 덜 들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적정(敵情)을 오직 5거의 방법으로만 전하여, 그 내용을 자세히 전달할 수 없어 군령(軍令)의 시달(示達)이 어렵고 또한 비와 구름 · 안개로 인한 판단곤란과 중도단절 등의 결점이 있었다.
반면에 파발은 경비가 많이 소모되고 봉수보다는 전달속도가 늦은 결점이 있으나 문서로써 전달되기 때문에 보안유지는 물론 적의 병력수 · 장비 · 이동상황 그리고 아군의 피해상황 등을 상세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파발제는 봉수가 군사목적 이외에는 이용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관리들의 사목적(私目的) 추구에 이용되어 사회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봉수제는 점점 복구되었으며, 특히 북로봉수(北路烽燧)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였다. 조정에서는 봉수군의 기강을 확립하도록 조치하고 선전관을 파견하여 연대의 상태를 직접 순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숙종 이후부터는 무너진 봉대를 다시 쌓고, 봉수를 더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봉수군의 근무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봉호보(烽戶保)를 배정하여 수포(收布)함으로써 봉수군의 경제적 처지를 향상시키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한편 종래의 봉수제도의 근본적 모순과 운영상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 있었다. ‘봉수변통론(烽燧變通論)’이 그 하나의 예이다.
봉수변통론은 봉수군의 도망과 구름이나 안개 등의 자연장애로 인하여 후망할 수 없거나 봉수의 단절로 말미암은 북로봉수구폐책(北路烽燧救弊策)의 하나로 논의된 변통정책이다. 이 때 논의된 봉수변통론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각자거화론(各自擧火論), 봉수의 이설(移說)과 가설, 마발(馬撥)의 배치, 화포설치론 등이다. 각자거화론은 거화법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북로봉수의 경우 연변에 있는 봉수가 적과 접경지에 있다. 그 때문에 비 · 바람 등의 자연장애로 인하여 차례차례 전달할 수 없을 때에는 화저봉(火底烽:최초로 봉화를 올리는 봉수)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거화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자는 것으로 이는 1677년(숙종 3) 호조참판 여성제(呂聖濟)의 건의에 따라 비롯되었다.
봉수의 이설이나 가설은 봉대의 사이가 너무 멀거나, 달려가 보고할 수 없기 때문에 간봉(間烽)을 설치하자는 것으로 함경도 고원(高原)과 문천(文川) 사이의 간봉 설치나 갑산(甲山) 동인보(同仁堡) 이설에 따른 봉수신설, 안변(安邊)과 회양(淮陽) 및 육진(六鎭) 봉수간의 간봉설치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마발을 배치하자는 것은 기존의 파발을 이용하자는 주장으로, 이것은 1686년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견해에 따른 것이나 병조판서 이사명(李師命)은 기보병(騎步兵)과 마발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발참(撥站)을 활용하여 봉수제를 보완한 사례가 각종 지리지 및 읍지에 보이고 있다.
화포설치론은 연대에 화포를 설치하여 소리로써 신호 보내는 것으로(以聲相應), 원래 연대에는 뿔[角]이나 화포를 두어 보조적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는 1702년 북병사(北兵使) 이홍술(李弘述)이 적극 제도화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봉대간의 거리 문제, 화포취급자의 교육과 충분한 화약의 보급이 요구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와 같은 봉수변용론은 주로 함경도지방을 중심으로 한 북로봉수에서 제기되어 그 일부가 실시되었으나 봉수제 전반에 관한 개혁책은 아니었다. 봉수제는 파발 · 역참제도와 병행되면서 그 치폐(置廢)를 거듭하다가 1894년(고종 31)에 8로봉수는 현대적인 전화통신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봉수는 전달수단에 의한 구분과 연대의 설치지역에 의하여 나눌 수 있다. 전달수단에 의한 구분은 봉과 수로서 봉은 밤에 불로써, 수는 낮에 연기로써 알리는 방법이다. 봉수는 봉과 수를 합친 말이다.
그러므로 봉화는 원래 야봉(夜烽)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널리 주수(晝燧)까지 포함한 뜻으로 쓰여져 고려 이래 조선시대에 있어서 흔히 봉화라고 통칭되었고, 간혹 주연과 야화 등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야화보다는 주연이 바람 · 비 · 구름 등으로 가리울 경우 간망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주수로는 바람을 쉬이 타지 않는 낭분(狼糞)을 태웠으므로 낭연(狼煙)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낭연을 사용한 실례는 찾지 못하였다.
연대의 설치지역에 따라 경봉수(京烽燧) · 내지봉수(內地烽燧) · 연변봉수(沿邊烽燧)로 구분되며 시설과 정원 및 처벌규정에 각각 차이가 있었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 목멱산(木覓山:南山)에 위치하여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 불렀고, 연변봉수는 해륙변경(海陸邊境)의 제1선에 설치하여 연대라 호칭한 것으로 그 임무수행이 가장 힘들었다.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 수적으로 대다수였다. 이 밖에 직봉(直烽) · 간봉(間烽)이라는 구분이 있었으나, 이는 직선봉수와 간선봉수의 약칭으로서 봉수대 자체의 구분은 아니고 그 봉수가 위치한 선로상(線路上)의 구분이지만 조선 전기에는 이와 같은 용어가 분명히 쓰여진 경우는 나타나지 않는다.
봉수의 관장은 중앙에서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에서, 지방에서는 수령(守令)의 직접 책임 아래 감사(監司) · 병사(兵使) · 수사(水使) · 도절제사(都節制使) · 순찰사(巡察使) 등 모든 군사책임자가 모두 이 임무를 맡았는데 수령과 감사는 행정책임자보다도 군사책임자의 위치에서 맡았던 것이다.
수령은 우선 봉수군 후망의 근(謹) · 불근(不謹)을 감시, 감독하여 이와 연대책임을 졌으며, 그들의 차정(差定) 및 출근은 물론 봉수대의 이상유무를 항시 감찰하였다.
감고(監考) 책임으로 봉수대의 이상유무를 수령에게 보고하되 유사시에는 즉시, 평상시에는 매 10일에 1회, 수령은 이를 받아 유사시에는 즉시, 평상시에는 매월 말마다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한편, 수령은 계월(季月:3 · 6 · 9 · 12월)마다 병조에 보고하였다. 봉화가 단절되었을 경우 수령은 곧 그 사연을 병조에 알려야 하며 관하 봉수의 잘잘못은 직접 수령의 공과(功過)와 연결되어 있었다.
국경의 중요한 군사정보는 그 정세의 완급에 따라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거화법에 따라 전보되었다. 고려시대는 1150년(의종 4)에 규정된 봉수식에 따라 4구분되어 거화되었다.
야화와 주연은 평상시 1거, 연방의 위급사태 때는 2거, 적이 침입하여 전투가 임박할 때는 3거, 적과 아군이 접전중에는 4거를 올렸다.
그 뒤 고려 말∼조선 초에는 2구분법으로 변경되었다가 1419년 5월에 획기적인 봉수제의 확립과 더불어 5구분법으로 재구분되었다.
이 때에는 해상과 육상을 구별하여, 해상의 경우에는 아무런 일이 없을 때는 1거, 왜적이 해중(海中)에 나타나면 재거(再炬),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과 접전하면 4거, 육지로 침입하면(下陸) 5거로 하였다.
육지의 경우는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재거,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우리 군사와 접전하면 5거씩 올리도록 하고, 낮에는 연기로써 대신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거화법은 『경국대전』에서는 바다와 육지의 구분 없이 5거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거화법에 의하여 상달된 정세는 경봉수에서는 오원(五員)이 병조에, 지방봉수에서는 오장(伍長)이 관할진장(管轄鎭長)에게 보고하였다.
서울에서는 따로 병조에서 사람을 배치하여 남산봉수를 관망하고 무사할 경우에는 그 다음날 아침에 승정원에 보고하여 왕에게 상달(上達)하게 하고, 변란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곧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만약 전봉(前烽)에 봉화가 오르지 않거나 비 · 바람 등으로 연기와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봉수군이 즉시 다음 봉수에 치고(馳告)하여야 했다.
제1선 군사요새로서의 연대에서 적침(賊侵)을 주위에 급히 알리는 수단으로서는 봉화 이외에 포성(砲聲)과 각성(角聲)이 병용되었고, 또 연대는 서로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만큼 구름 · 바람 · 비 등의 날씨가 궂은날에는 치고보다도 포성 · 각성에 의하여 다음 봉수에 정세를 전달하였다.
조선 초기 봉수대의 시설은 보잘것 없고 또 경봉수 · 연변봉수 · 내지봉수에 따른 구별도 없었던 듯하다. 세종 4년 8월부터 특히 연변봉수에 아무런 방벽이 없는 까닭으로 도리어 적이 침입하는 경우가 있음에 비추어 그 시설 개선을 도모하게 되었고, 이는 세종 20년 3월 경에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① 연대:연변봉수에는 연대를 쌓되 높이 25척, 둘레 70척, 대하(臺下) 4면의 길이가 각 30척, 그 밖에 깊이 · 넓이 각 10척의 참호를 둘러서 파며, 다시 그 주위에 길이 3척의 말뚝을 박아 폭은 10척의 말뚝지대를 설정했는데 이때 사용된 척수(尺數)는 영조척(營造尺) 기준이었다.
한편 연대 위에는 임시집[假家]을 지어 화기 등 각종 병기와 생활필수품을 간수하게 하였다. 화기를 비롯한 각종 병기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자체 방위상 필요하였고, 그 중 신포(信砲)와 발화(發火) 등은 각(角)과 더불어 위급을 알리는 중요 신호수단이었다.
② 연조(烟竈):내지봉수는 위험도가 적어 연대는 쌓지 않고 연조(아궁이)만 설치하였으나 아주 위험한 곳에는 연대를 쌓았다. 연조는 위는 뾰죽하고 아래는 크게 네모 또는 둥근 모양으로 만들고 그 높이는 10척을 넘지 않게 하였다. 짐승이 침범할 우려가 있는 곳에는 둘레에 담을 쌓았다.
그리고 1475년(성종 6) 이후 모든 봉수에는 연조 위에 반드시 연통(烟筒)을 만들어 바람으로 주연이 흐려짐을 방지하였다. 경봉수의 설비는 따로 정해진 것은 보이지 않으나, 내지봉수의 그것과 동일하였을 것이다.
③ 5소(五所):모든 봉수에는 봉수대(烽燧臺)가 다섯 개 있었다. 이는 거수를 5구분하였으므로 5거일 경우에는 횃불 다섯을 올려야 하므로 봉수소가 반드시 다섯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원칙상의 이야기이고 봉수제의 문란, 즉 허설화에 따라 그대로 지켜지지 않은 예가 많이 있었다.
봉수대 위에 생활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으로 봉화군과 오장(伍長:監考) 또는 오원(五員)이 있었다. 봉화군은 주야로 후망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고역을 직접 담당하였고, 오장은 대상(臺上)에 함께 기거하면서 봉화군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봉화군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는 봉졸 · 봉군 · 봉화군 등으로 통칭되었는데 봉화간(烽火干) · 봉수군 · 간망군(看望軍) · 후망인(堠望人) · 해망인(海望人) 등의 별칭도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봉수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은 대상 근무자는 봉군뿐이었는데, 1446년(세종 28)경부터 감고의 제도가 생겼고, 이는 언제부터 개칭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경국대전』에는 오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봉수의 오장은 오원이라고 불렀고, 이 역시 1447년경부터 두게 되었던 듯하며 지방봉소의 오장과 그 신분 · 처우 등에서 어떠한 차이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경국대전』에 봉군과 오장의 정원 및 교대는 봉군의 정원을 10인으로 규정하고, 매소(每所) 5인씩 상하양번(上下兩番)으로 10일씩 교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지봉수의 정원은 매소 6인, 양번으로 3인씩, 10일간 근무하고 교대하였으며, 경봉수는 매소 4인으로 규정하였다. 다음 오장은 연변봉수 · 내지봉수 · 경봉수 모두 매소 2인 상하양번이었다. 봉수군의 신분은 신량역천(身良役賤)이었다. 신분상으로는 양인(良人)이나, 국역담당에 있어서는 천인(賤人)의 중간이었다.
고려 말부터 기록에 자주 보이는 중앙의 문무고관이 죄를 짓는 경우 흔히 봉졸로 보내어지는 예로써 봉졸 신분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고, 세종 초년경의 기록에는 간(干) · 척(尺) 등과 동일한 것이라 하였다.
봉수관계의 벌칙은 불근봉화(不謹烽火) 또는 불근후망(不謹堠望)이라 하여 후망(堠望, 看望)을 게을리한 데에 가장 중점이 두어졌다. 『경국대전』에는 봉수관계의 벌칙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수교집록(受敎輯錄)』의 조례로 나타나며, 후기의 『속대전』 · 『대전회통』 등 법전에는 수령에 대한 형량까지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봉수망은 잠시도 그 기능이 중단될 수 없는 점과 그 설치 장소가 후망에 편리한 높은 산에 위치하여야 하는 변할 수 없는 자연조건 때문에 고려 말의 봉수선로가 조선 초기에도 대체로 계승되었을 것이다.
그 뒤 세종 4년 12월에 병조로 하여금 의정부 및 6조와 더불어 봉수를 의정(議定)하게 하였다 했으니 이는 조선왕조의 봉수망으로 재편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종 28년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모든 봉수에 대한 규정을 크게 개혁정비하였는데 이때 전국봉수의 각 선로별 성책(成冊)을 만들어 경외(京外)의 관아(官衙)에 수장하였다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에까지 크게 개편된 예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조선 전기에 봉수망의 구체적인 배치를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세종실록』 지리지 · 『경국대전』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봉수조 등이며, 후기에는 『증보문헌비고』와 『만기요람』, 각 읍의 읍지 및 『대동여지도』 등이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봉수조에 의하면 전국 5로의 주요선로[幹線]를 직봉(直烽)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동북쪽 두만강변의 우암(牛巖:慶興 西水羅), 동남쪽 해변의 응봉(應峰:東萊 多大浦), 서북쪽 압록강변의 여둔대(餘屯臺:江界 滿浦鎭)와 정주(靜州:義州), 서남해변의 돌산포(突山浦:順天 防踏鎭)를 기점으로 모두 서울의 목멱산에 도달하게 되어 있었다.
또, 직봉 이외에 간봉(間烽)이라는 보조선이 각 직봉선상에 적지 않게 있었는데 그 중에는 직봉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결하는 장거리의 것과, 국경방면의 전선초소로부터 본진(本鎭) · 본읍(本邑)으로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