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높이 150㎝, 불상 높이 124㎝, 어깨 너비 53㎝, 무릎 너비 69㎝, 대좌 높이 26㎝. 197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굴암산(窟庵山) 중턱의 자연 암굴 안에 안치되어 있다.
동굴 앞에는 1972년 입주상량(立柱上梁)한 목조4칸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 고려시대 이후에 조성된 불상들 중에 자연 암굴을 안치 장소로 이용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 불상 역시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 왼손은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내리어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을 결하고 방형(方形 : 네모반듯한 모양)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다. 불상의 상태는 상호(相好 :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와 왼쪽 무릎 부위에 보수한 흔적이 있으나 비교적 온전한 편이다.
불상은 현재 주색(朱色)으로 가채되어 있는 상태이다. 가채 사이로 보이는 조각 수법이나 양식적인 측면에서 대좌와 동일하여 불상과 대좌가 원래부터 일조(一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적인 느낌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안정감이나 중후감은 다소 떨어진다. 그러나 종교상으로서의 엄숙함과 인자함은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불두(佛頭)와 두 손이 불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조각되어 있다.
또 불두가 크게 표현됨으로써 어깨가 다소 작아 보인다. 하체의 표현 역시 중후함을 보이기 위하여 두껍게 조각하였다. 그러나 무릎의 너비가 좁아 안정감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하겠다.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는 고려 초기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 중에 하나인 낮고 평평한 모습이다. 머리는 역시 이 시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나발(螺髮 :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을 하나하나씩 큼직큼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상호는 눈 부위를 보수하여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윤곽선으로 미루어 보아 원만한 듯하다.
내려뜨린 귀는 어깨까지 닿아 있고, 입도 크게 표현하였다. 입의 크기는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양 입가의 길이가 통일신라시대보다 훨씬 길어진다. 이 불상의 경우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삼도(三道)의 표현은 확인되지 않고, 목의 굵기는 불두와 불신과의 비례에서 적절성을 유지하고 있다.
상반신은 볼륨감은 풍부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깨를 부드럽게 처리하고 옷주름 선을 둥글게 처리하는 등 단아함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하반신을 지나치게 두텁게 처리하거나 양 무릎 사이의 너비를 좁힘으로써 무게의 중심이 하체에 너무 많이 실려 있는 느낌이다.
착의 방법은 통견의(通肩衣 : 어깨에 걸쳐진 옷) 형식이다. 내의를 착용하고 있다. 표현 방법은 어깨나 가슴 부위의 조각은 불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양팔 위나 무릎을 덮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두껍게 처리하거나 형식적인 면이 강한 느낌이다. 내의에도 희미하게 가는 음각으로 옷주름 선을 묘사하고 있다.
대좌는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불상대좌의 유형으로 볼 수 있는 방형 대좌이다. 중대석과 하대석은 상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상대석으로 복판(復瓣 : 겹잎) 복련문(覆蓮文 :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무늬)이 조각되어 있다.
육계와 나발의 표현 양식, 불신의 모습 그리고 대좌의 형태에서 이 불상의 조성 연대는 고려 초기라고 생각된다. 아울러 석굴과 약 1㎞ 떨어진 산록에 석조여래좌상 1구와 석탑 1기가 있다. 이들 석조물과도 관련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