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머리 일부와 어깨, 하반신이 심하게 파손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상의 높이는 1.47m이다. 원래 석조여래좌상이 있던 곳은 상주시 복룡동 358번지였으나, 1975년 10월 현재의 자리로 이건되었다. 석불이 위치한 곳은 상주의 명산으로 알려진 왕산의 동쪽 중턱이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가 없으며 불상의 신체도 하반신과 육계(肉髻), 손 등에 손상을 입어 불완전한 모습이다. 남은 부분의 신체는 괴량감(塊量感)이 강하고 인체 표현은 경직되어있다. 굴곡이 표현되지 않은 무겁고 둔중한 신체와 형식화된 옷 주름 표현은 이 불상이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식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머리에는 오른쪽으로 말린 머리카락인 나발(螺髮)들이 둥글고 큼직하게 표현되었고 상투 형태의 육계(肉髻)는 남아있지 않다. 타원형의 풍만한 얼굴에는 가늘게 뜬 눈이 옆으로 길게 새겨졌고, 콧날이 약간 손상되었으며, 입은 코 바로 아래 작고 두툼하게 표현됐다. 파손과 마멸이 심하지만 이 불상의 얼굴에서 인간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짧은 목에는 세 줄의 목주름[삼도(三道)]이 있고, 두툼한 어깨는 비스듬하게 처졌다. 팔 아래가 깨져서 다리 표현과 전체 비례는 알아볼 수 없다.
목 부분에서 옷깃이 뒤로 젖혀진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는 양 어깨에서 부채꼴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불의는 몸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팔만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이다. 같은 간격으로 계단처럼 표현된 옷 주름은 좌우대칭으로 흘러내린다
오른손은 깨어져 명확하지 않지만 두 손이 아래위로 겹쳐져 있으므로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판단된다. 원래 지권인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는 것이지만 이 불상은 왼손이 위에 있어서 좌우가 바뀐 지권인으로 생각된다.
신체의 사실적 묘사가 부족하고, 나발이 크고 굵으며, 형식화된 옷 주름의 표현 등에서 볼 때 상주 복용동 석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조각으로 생각된다. 좌우 손의 위치가 바뀌었으나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이 신라 하대만이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제작되고, 신앙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좋은 예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