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법당으로 1824년에 중창되었다.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200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계산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하였던 것을 통일신라 875년(헌강왕 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들이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타 없어져 1660년(현종 1)에 경잠 · 경준 · 문정 등 3대사가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현존 대웅전은 상량문이 발견되어 1766년(영조 42)에 불탄 것을 1824년(순조 24)에 중창되었음이 밝혀졌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칸 · 옆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 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높이 1m로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배열하였는데, 앞면에는 3단으로 굄을 둔 둥근 주춧돌을, 뒷면 · 옆면에는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문은 모두 빗살을 둔 4분합문(四分閤門)이며 위에 교창(交窓 : 창문 위에 두는 낮은 창)을 두지 않았다.
내부는 천장을 井자 모양의 반자로 막은, 이른바 우물천장으로 하였고, 고주(高柱) 2개를 세워 그 앞에 불단(佛壇)을 마련하는 한편, 후불벽(後佛璧)을 세워 후불탱화(後佛幀畵)를 걸고 앞에 본존불을 안치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출목수가 많아서 처마 끝이 심하게 휘어 올라갔으나 날렵하기보다는 장중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이다. 가구(架構)는 중도리와 중상도리가 있는 7량가(樑架) 구조인데, 중도리의 장연 위에 덧도리를 보내고 종도리와 덧도리를 곧바로 연결하는 단연을 걸었던 점에서 특이한 형식을 보인다. 자연석 기단위에 놓인 초석은 주좌가 있는 초석과 덤벙주초가 혼용되었고 그 위에 세워진 기둥은 민흘림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에는 모두 궁창판이 있는 4분합의 빗살문을 달고, 양측면의 남측 협칸에만 출입문을 달아 벽체로 마감하였고 후면 중앙에만 2분합의 세살문이 있고 나머지는 벽체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내부로는 모두 우물마루가 짜아졌으며 어칸의 후면으로 불단을 놓아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기둥위에 짜아진 포작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라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전후면에는 각 3조씩, 양측면에는 각 2조씩의 주간포를 배치하였으며 첨차는 교두형(翹頭形)이지만 내외살미는 외부에서 앙서형을 이루고 내부에서는 화려한 연봉형장식으로 마감하였다. 포작은 외3출목(7포작) 내4출목(9포작)이며 조선 후기 건축에서 보이는 연봉장식 등의 요소가 두드러진다.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머리에 용머리 장식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계보를 이룬 부안의 내소사대웅보전(보물, 1963년 지정) · 개암사 대웅전(보물, 1963년 지정)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화려한 건축양식과 가구의 수법 및 포작의 장식성이 뛰어나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