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는 봄·가을에 묘를 살펴서 손질하는 민간 의례이다. 주자 『가례』에 의하면 성묘는 묘제(墓祭)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으나, 본래는 성묘에 제례의 절차가 합쳐져 나중에 묘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성묘의 형식은 크게 보아 분묘의 손질과 배례(拜禮)로 나뉘어진다. 성묘는 죽은 조상의 육체가 묻혀 있는 장소에서 직접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속에는 조상숭배의 관념이 내재되어 있다. 현대의 분묘는 조상의 혼과 육체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곳으로, 후손에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전묘(展墓) · 배분(拜墳) · 배소례(拜掃禮) 또는 상묘의(上墓儀)라고도 부른다. 주자의 『가례』에 의하면 성묘는 묘제(墓祭)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으나, 본래는 성묘에 제례의 절차가 합쳐져 나중에 묘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손여제(孫汝濟)의 『예서유편(禮書類編)』에 의하면, 묘제는 진나라 때의 여묘(廬墓)로부터 시작되어, 당나라의 개원(開元, 713∼741) 연간에 한식상묘(寒食上墓)의 풍속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배소례에 대해서는 『개원례(開元禮)』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기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날에 묘의 영문(瑩門) 밖에서 재배하고 봉분에 올라가 주위에 심은 나무들의 안팎을 두루 살펴 세 번 돌아보고 가시나무와 칡넝쿨 · 잡초를 잘라 베어내고, 다시 영문 밖으로 나와 재배를 한다고 하였다. 한편 『제록(祭錄)』에 의하면, 벼슬길에 얽매여 타향으로 나가 있어 제 때에 배소를 하지 못하면 한식날에 집에서 제사로 대신해도 된다고 하였다.
또한 『외서(外書)』에 따르면 10월 1일에 배분(拜墳)을 하는데, 이것은 서리와 찬이슬이 내릴 때에 느끼는 감정 때문이며, 한식 때에도 관습에 따라 배분을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이굴(理窟)』에는 한식과 10월 1일의 전묘(展墓)는 초목이 처음 생기고 죽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가례』에 따르면 묘제는 3월 상순에 날자를 택해 지내도록 되어 있으며 이재(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4대 이상의 조상은 한위공(韓魏公)의 설명에 의해 10월 1일에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3월의 묘제에 사용되는 축문은 “계절의 기운이 차례로 흘러 바뀌고 비와 이슬이 봉분을 적시기 때문에, 이것들을 쓸어내려 봉분을 깨끗이 하고자 합니다.” 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10월 묘제의 축문은 “초목의 잎이 뿌리로 돌아가는 때를 맞아 근본을 갚을 일을 생각하게 되어 감히 봉분을 깨끗이 하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성묘는 봄 · 가을에 묘를 손질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가 당나라 이후에 봄의 성묘는 한식, 가을의 성묘는 10월 1일로 고정되었고, 그 뒤 언제부터인가 제례의 형식이 첨가되어 묘제로 발전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부터 이 배소례가 있었던 것 같다.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奉先雜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초 · 한식 · 단오 · 추석에 묘에 가서 배소를 해왔으니, 어떻게 폐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날 아침 일찍 사당에서 천식(薦食)을 하고 묘에 가서 상을 차려 배례하는 것이 좋다. 만약에 묘가 멀면 2, 3일 전에 묘소에 가서 재계하여 상을 차리고 배례한다.”고 하였다.
또한 송인(宋寅)은 “시제는 국법에 얽매여 증조까지만 지내는데, 묘제와 기제는 모두 고조까지 지내는 것이 옳으며, 5세조(五世祖)는 한식과 추석에, 6세조 이상은 단지 한식에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구(鄭逑)의 『한강집(寒岡集)』에 따르면, 명절의 묘제는 우리나라에서 가묘(家廟)를 세우기 전에 행해오던 것으로서, 가묘를 세운 다음에는 『가례』에 따라 지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한식과 추석에는 『가례』에 의해 묘제를 지내고, 정조와 단오에는 간단히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조호익(曺好益)은 『지산집(芝山集)』에서, 명절의 묘제는 예가 아니나,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주자나 이황(李滉)도 역시 종래의 풍속을 따라 없애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루어보아 성묘는 대체로 16세기 중반까지는 묘제와 관계없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뒤에는 묘제의 형식으로 발전 또는 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성묘가 묘제의 형식으로 변하게 된 데에는 『가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당시에는 옛날부터 행해오던 관습인 성묘와 『가례』의 묘제가 함께 행해졌거나, 이를 절충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때에는 예학자들의 학설이나 해석에 따라 가문이나 지방에 의해 성묘나 묘제의 시기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대체로 지금까지 변해온 것을 살펴보면, 정초에는 차례만, 한식에는 성묘만, 추석에는 차례와 성묘를, 그리고 10월에는 4대 이상의 조상에 대한 묘제가 각각 행해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성묘의 형식은 크게 보아 분묘의 손질과 배례(拜禮)로 나뉘어진다. 이러한 형식은 죽은 조상의 육체가 묻혀 있는 장소에서 직접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속에는 조상숭배의 관념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조상숭배의 한 유형인 묘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조상의 혼을 모시는 사당이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한 현대의 분묘는 조상의 혼과 육체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곳으로, 후손에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성묘는 묘제라는 형식으로, 그 숭배대상이 근친으로 한정되면서,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