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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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서해도원수, 문하찬성사, 서경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득지(得之)
노당(蘆堂), 허강(虛江)
이칭
허당(虛堂)
시호
공정(恭靖), 정안(定安)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28년(충숙왕 15)
사망 연도
1401년(태종 1)
본관
청송(靑松)
주요 관직
좌우위녹사|판위위시사|예의판서|서해도원수|지문하부사|문하찬성사|서경도원수|문하좌시중|좌정승
관련 사건
위화도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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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심덕부는 고려후기 서해도원수, 문하찬성사, 서경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28년(충숙왕 15)에 태어나 1401년(태종 1)에 사망했다. 음직으로 출사한 이후 판위위시사, 우상시, 예의판서와 강계도만호·의주부원수·서해도원수 등의 요직을 거쳤다. 최무선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실전에 사용하였으며 이성계와 함께 동북면에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는 전공을 세웠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폐가입진(廢假立眞)에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조선 개국 이후 신왕조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여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하는 일을 총괄하였다.

정의
고려 후기에, 서해도원수, 문하찬성사, 서경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蘆堂) · 허당(虛堂). 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郎) 심용(沈龍)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 충숙왕 복위년 말에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동정(司溫直長同正)에 출사한 이후, 좌우위녹사(左右衛錄事)를 거쳐 1364년(공민왕 13) 수원부(水原府)의 수령이 되었다.

공민왕 말년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우왕 즉위 후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우왕 원년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승직되었다. 이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와 강계도만호(江界都萬戶) · 의주부원수(義州副元帥) · 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378년(우왕 4) 밀직사로 재임하면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서해도원수를 겸하여 여러 차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다. 특히 1380년 도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실전에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85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를 겸하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북청(北靑) 등지에서 동북면에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겨울에는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는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좌군에 속하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또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폐가입진(廢假立眞)에는 이성계 · 정도전(鄭道傳) ·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주도적인 구실을 하여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공양왕 즉위 직후에 문하좌시중 · 경기좌우도 · 평양도통사(門下左侍中京畿左右道平壤都統使)에 올랐으며, 이듬해 청성군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같은 해 말, 비어(飛語)에 따른 무고로 인해 일시적으로 황해도 토산(兎山)에 유배되었다.

그 뒤 1391년(공양왕 3) 다시 문하좌시중에 복직되고, 하정사인 왕세자 왕석(王奭)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성계 · 정몽주와 함께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92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조선의 개국을 맞아, 1393년(태조 2)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며,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1397년 판문하부사, 이듬해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72세 때인 1399년(정종 1)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이듬해 치사하였다. 심덕부는 고려 말 정치제도의 개혁과 왜구 토벌에 업적을 남겼다. 공양왕 때에 관찰사제를 폐지하고 안렴사제(按廉使制)를 부활시킬 것, 제사(諸司)의 서무를 도당(都堂)에 직접 보고할 것 등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조선 개국 후에는 신왕조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394년에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營建)하는 일을 총괄하여 신도 건설에 큰 구실을 하였다.

한편, 심덕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다섯째 아들인 심온(沈溫)은 세종의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여섯째 아들인 심종(沈淙)은 태조의 부마가 되었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거족(巨族)으로 성장하는 기틀이 이로써 이루어졌다. 처음의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기문(大東奇聞)』
『동문선(東文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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