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태조 1)에 개경에서 조선을 개창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근거지였던 개경을 벗어나 새로운 도읍의 개창을 추진하였다. 즉위 직후부터 추진한 천도 논의는 찬반 논쟁이 거셌으나 결국 태조의 의지대로 천도가 결정되었다.
1394년(태조 3) 8월 8일에 태조는 직접 여러 관원을 거느리고 도읍터를 살펴보았다. 후보지였던 무악(毋岳)과 한양(漢陽)을 차례로 방문하고 최종적으로 한양으로 천도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한양 천도가 결정된 직후 태조는 그해 9월 1일에 새로운 도읍지의 궁궐을 건설하는 사안을 맡길 임시기구로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였다.
다른 도감들과 마찬가지로 임시적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즉, 새로운 도읍인 한양에서 왕이 거처할 궁궐을 조성하는 사안을 전담하는 역할을 맡았다. 도감을 설치한 직후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左僕射) 김주(金湊), 전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염(李恬),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 이직(李稷)을 판사(判事)로 제수하여 도감의 사무를 전담하게 하였다. 이들은 모두 태조의 최측근이자 토목 영건에 역량이 있는 이들이었다.
도감의 판사들은 중신이었던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한양을 답사하면서 궁궐을 비롯하여 새 도읍의 종묘와 사직, 시장과 도로의 터를 정하였다. 이는 도성의 기본 요건인 좌묘우사(左廟右社)와 면조후시(面朝後市)의 원칙을 세운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양 도성의 기본 설계가 완료되었고 한양의 첫 궁궐인 경복궁(景福宮)의 터도 정해졌다. 도감의 관원들은 본격적으로 한양에서 도읍을 건설하는 사안을 전담하였다.
태조는 도성의 완성을 기다리지 않고 1394년 10월 25일에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여 한양부 객사를 이궁으로 삼아 거처하면서 종묘와 궁궐 공역을 기다렸다. 궁궐 공역은 전국의 역부와 장인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독려하며 진행되었다. 결국, 1395년(태조 4) 9월에 경복궁이 완공되었다.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도합 800여 칸이었고 전각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경복궁이 완료됨과 동시에 신도궁궐조성도감의 역할도 마무리되었고, 결국 이 당시 도감도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신도궁궐조성도감의 해체 직후인 윤9월에는 별도로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새롭게 설치하였고, 이 기구에서 한양 도성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와 별개로 태조는 경복궁에 거처하면서 12월 28일에 새 도읍의 궁궐 공역은 마무리되었다. 이후 도성 공역은 지속되어 1398년(태조 7) 2월, 1차적으로 한양 도성의 건립이 완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