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득중 ()

양득중 영정
양득중 영정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지평, 장령, 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택부(擇夫)
덕촌(德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65년(현종 6)
사망 연도
1742년(영조 18)
본관
제주(濟州)
출생지
영암
주요 관직
회인현감|김제군수|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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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지평, 장령, 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택부(擇夫), 호는 덕촌(德村). 영암(靈巖) 출신. 아버지는 양우주(梁禹疇)이며, 어머니는 죽산안씨(竹山安氏)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양팽손(梁彭孫)의 6대손이며, 안방준(安邦俊)의 외증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세에 박태초(朴泰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뒤에는 윤증(尹拯)의 문인이 되었다. 이세필(李世弼)·신익상(申翼相)·박세채(朴世采)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학자로서의 명망이 높았다. 1694년(숙종 20) 학행으로 천거받아 1697년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었다.

이어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공조좌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1703년 공주의 덕촌(德村)으로 이사하여 스승 윤증을 가까이 모시고 학문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1706년 회인현감에 임명되었고, 그 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위(翊衛)·위수(衛率)·익찬(翊贊), 김제군수, 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1734년(영조 10)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임명되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수취체제(收取體制)의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實學)을 역설하여 학문풍토의 개선을 건의하였다. 탕평책(蕩平策)의 시행으로 고질적인 당파싸움을 없애자고 하였다. 「명대의변(明大義辨)」 등의 저술을 통하여 송시열(宋時烈)의 주장과 시책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또한 성리학에도 밝았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이이규(李以圭)·이확(李濩) 등이 있다. 저서로는 『덕촌집』 10권 5책이 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덕촌집(德村集)』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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