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산성은 세종시 운주산에 있는 내성과 외성의 구조로 축조된 대형 성곽이다. 백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통일신라 시대의 축조물일 가능성이 있다. 둘레가 3,098m에 이르는 대형 산성으로, 내부에 다수의 건물지, 우물터, 절터 등이 있다. 산성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이미 산성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기우제단이 설치되었다. 출토된 유물, 문헌 기록 등을 종합하면 이 산성은 시대별 특징을 가지고 활용되었다. 운주산성은 한국의 산성 발달사에 있어 학술적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운주산성은 백제시대 축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 근거는 뚜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차에 걸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산성의 규모와 성격, 축조시기 등이 규명되었다. 운주산성은 둘레가 3,098m에 이르는 대형 산성이다. 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성내부에는 다수의 건물지, 우물터, 절터 등이 분포되어 있다.
전의면과 전동면 일대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다수의 산성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운주산성은 그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산성이다. 정상부에서는 동쪽으로는 미호평야와 청주시, 북쪽으로는 천안시와 목천 일대, 남쪽으로는 세종시 일대가 조망된다. 천안과 청주 사이의 교통로가 통과하는 지역이며 양 지역의 경계지대이다.
운주산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고 있다. 이 책에서는 운주산성을 고산산성으로 기록하고 둘레는 5,132척이며 우물이 1개소이고 이미 폐허가 되었다고 전한다.
『대동지지』 성지조에도 고산산성이라 보이고 둘레 5,132척, 우물 3개소로 기록되어 있다. 『호서읍지』(1871) 전의현 산천조에는 운주산에 고성터가 있고 기우제단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운주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던 시기에는 이미 산성으로 기능을 하지 못하였고 그 이전 시기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기우제단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운주산성에 대한 1차 발굴조사는 1997년에 이루어졌다. 이 당시 조사에서 동문지가 확인되고 동문지 주변에서 건물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동문지와 건물지에서는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통일신라시대 기와였다. 삼국시대나 백제로 볼 수 있는 유구나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로 보면 운주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다음의 발굴조사는 서문지 주변의 대지와 성벽에 대하여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사용되었던 건물지 1동이 출토되었다. 아울러 성벽의 축조 방식도 파악되었다. 성벽 기초부는 생토층을 정지한 후 그 위로 회색의 점질토와 여기에 작은 할석들을 섞어서 다져 구성하였다.
기초다짐층의 폭은 3m, 높이는 1.8m이다. 그 위로 다듬지 않은 대형석재들을 기단석으로 올려 놓고 다시 그 위로 장방형, 방형 등 잘 다듬은 화강암계 석재를 사용하여 외벽면을 축조하였다. 기단석 위에 면석은 기단석에 비하여 20∼30㎝ 안으로 들여쌓기를 하였다. 이밖에도 배수구와 추정문지 등도 조사되었으나 이미 교란이 심하게 이루어져 그 성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운주산성은 한국의 산성 중 보기 드문 대형 산성으로 주목된다.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규모가 크다는 점에서 여러 시기에 걸쳐 사용되면서 점차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출토된 유구와 유물, 문헌 기록 등을 종합하면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 특징을 가지며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국의 산성 발달사에 있어 학술적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으로 주목된다.
운주산성의 조사 결과 백제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아직 출토된 예가 많지 않아 백제시대 축조설을 뒷받침 하기는 부족하다. 다만 백제토기가 소수지만 출토되어 산성의 축조나 운영과 관련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