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3칸, 측면 1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 1976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588년(선조 21)에 조헌(趙憲)이 이이(李珥)의 후학임을 자처하여 자호(自號)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후율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죽은 뒤 사당이 되었다.
원래는 옥천군 용촌 밤티[栗峙] 에 있던 것을 1854년 안내면 백양리로 이건하였다가 1864년 현 위치로 이전한 뒤, 1977년 정화사업으로 전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조헌이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명을 규합, 영규(靈圭)의 승병과 함께 청주를 수복한 공을 세웠던 곳이다.
1621년(광해군 13)에 판각한 항의신편(抗義新篇) 판본 125장, 유림시판(儒林詩板) 10매, 선조가 하사한 조서(詔書) 1장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최근 금산 칠백의총(七百義塚)이 건립되면서 그 곳으로 이관되어 보존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정문으로 솟을삼문이 세워져 있고 돌로 쌓은 담장이 둘러져 있다. 뜰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효자각이 있는데 조헌의 아들인 완기(完基)의 효자 정려가 걸려 있다. 현재 배천조씨(白川趙氏) 종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