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조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예조좌랑, 병조좌랑, 경상도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정평(正平)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2년(선조 5)
사망 연도
1637년(인조 15)
본관
칠원(漆原,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
주요 관직
예조좌랑|병조좌랑|경상도도사|북청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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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예조좌랑, 병조좌랑, 경상도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정평(正平). 윤덕형(尹德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신(尹信)이다. 아버지는 윤창명(尹昌鳴)이며, 어머니는 금극인(琴克仁)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고, 1605년(선조 38)에 사헌부감찰에 진출하였다.

예조좌랑으로 옮겼고 이듬해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경상도도사로 파견되었다. 1611년(광해군 3) 북청판관으로 제수되었을 때 법을 무시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임지로 부임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의 인척으로 권세에 아첨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체차(遞差: 관직이 교체되거나 교체되는 과정의 대기상태)되었다.

그 뒤 익산군수로 부임하여 전주지역 옥토의 수로를 개통시킨 역사로 가자(加資: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직에 오름.)되었고, 경기전(慶基殿) 조성시 종시감동차사원(終始監董差使員)의 임무를 성공리에 마쳐 가자되기도 했다. 1616년(광해군 8) 황해감사로 재직 시 이이첨(李爾瞻)·유희분(柳希奮)·한찬남(韓纘男) 등의 권력 암투에서 빚어진 해주옥사에 연루되어 변방으로 귀양갔고, 인조반정 후에도 반정세력에 밀려나 충청도 제천에 은거해 살았다. 그 뒤 1626년(인조 4) 남한산성 수어와 식량 비축을 위한 둔전 설치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심기원(沈器遠)의 천거로 재등용되어 둔전사(屯田使)로 일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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