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정평(正平). 윤덕형(尹德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신(尹信)이다. 아버지는 윤창명(尹昌鳴)이며, 어머니는 금극인(琴克仁)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고, 1605년(선조 38)에 사헌부감찰에 진출하였다.
예조좌랑으로 옮겼고 이듬해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경상도도사로 파견되었다. 1611년(광해군 3) 북청판관으로 제수되었을 때 법을 무시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임지로 부임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의 인척으로 권세에 아첨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체차(遞差: 관직이 교체되거나 교체되는 과정의 대기상태)되었다.
그 뒤 익산군수로 부임하여 전주지역 옥토의 수로를 개통시킨 역사로 가자(加資: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직에 오름.)되었고, 경기전(慶基殿) 조성시 종시감동차사원(終始監董差使員)의 임무를 성공리에 마쳐 가자되기도 했다. 1616년(광해군 8) 황해감사로 재직 시 이이첨(李爾瞻)·유희분(柳希奮)·한찬남(韓纘男) 등의 권력 암투에서 빚어진 해주옥사에 연루되어 변방으로 귀양갔고, 인조반정 후에도 반정세력에 밀려나 충청도 제천에 은거해 살았다. 그 뒤 1626년(인조 4) 남한산성 수어와 식량 비축을 위한 둔전 설치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심기원(沈器遠)의 천거로 재등용되어 둔전사(屯田使)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