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순보(純甫) 혹은 순부(純夫), 호는 성계(星溪) 혹은 몽계(夢溪). 윤비(尹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승지 윤담무(尹覃茂)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윤지경(尹知敬)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박이서(朴彛敍)의 딸이다.
진사과에 합격한 뒤 1636년(인조 1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4년(인조 22) 정언에 발탁되고, 이듬해 헌납에 제수되었다가 1648년(인조 26) 성산현감(星山縣監)에서 물러났다.
그 뒤 경내와 가까운 곳에 우거하면서 인마(人馬)와 고직(雇直)을 징발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가, 이듬 해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을 지냈다.
인조가 죽자 문례관(問禮官)으로 일했고, 이어 헌납·수찬·교리·사간을 지냈다. 1654년(효종 6) 보덕·부응교, 이듬해 사헌부집의를 거쳐, 직간(直諫)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특별히 승지에 발탁되었다.
1656년(효종 8) 유도삼(柳道三)이 인평대군(麟平大君)에게 신이라 칭하고, 사사로이 대군을 만나는 사건을 두고, 대사간 유철(柳㯙)이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파직을 청했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 진도에 위리안치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조정의 신하들이 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던 상황에서 권시(權諰)와 함께 간쟁을 해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으며, 효종 또한 윤집을 사간원을 책임질 대사간으로 발탁하였다.
현종이 즉위하자 예조참의에 올라, 군민의 병폐를 해소하기 위해 호적제도를 바로잡는 것이 급선무라는 소를 올렸다. 이어 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이조참의·병조참의를 거쳐 다시 대사간에 올랐다가, 1667년(현종 8) 능풍군(綾豊君) 구인기(具仁墍)를 탄핵하였다.
이듬해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재임 중 정릉(靖陵: 중종의 능) 중건청(重建廳) 당상의 임무를 받아, 혼각(魂閣) 및 재실(齋室)을 중건한 공로로 가자(加資: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직에 오름)되었다.
그 뒤 이조참판·형조참판을 거쳐 1669년(현종 10)에 죽었다. 아버지 윤지경(尹知敬)이 인조반정 때 절의를 지켜 명망있는 아버지의 자손이란 칭찬을 받았고, 청렴하고 소탈해 마음씀이 구차하지 않아 일을 하는데 꾸밈이 없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