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백첨(伯瞻), 호는 석음와(惜陰窩). 이영인(李榮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사익(李士益)이다. 아버지는 이후망(李後望)이며, 어머니는 송담조(宋覃祚)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96년(숙종 22) 사마시를 거쳐 순안현령을 지내다가, 1705년 알성문과에 장원하고 지평이 되었다. 1710년 3월에 지평 이방언(李邦彦)과 함께 소론 최석정(崔錫鼎)을 공격, 배척하여 관작을 삭탈하게 하고, 저서 『예기유편(禮記類篇)』을 불사르게 하였다.
유생 곽경두(郭景斗)가 최석정의 유배를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자, 홍우서(洪禹瑞)·이택(李澤) 등과 함께 곽경두를 옹호하다가 정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12년 이후 정언·좌승지·황해도관찰사·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720년(경종 즉위년)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12월 김일경(金一鏡)의 소(疏)가 있자 흉참(凶慘)하다고 지적하고, 이 때 소론이 득세하여 송시열의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철폐하자 이를 통탄하여 항변하였다. 신임옥사가 일어나자 경산에 정배되었다가 동래에 이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득세로 풀려나와 예조참의·도승지·대사간·형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 때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 대사헌의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