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악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황해도관찰사, 대사간,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백첨(伯瞻)
석음와(惜陰窩)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53년(효종 4)
사망 연도
1728년(영조 4)
본관
용인(龍仁)
주요 관직
정언|황해도관찰사|수원부사|대사간
관련 사건
신임옥사
정의
조선 후기에, 황해도관찰사, 대사간,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백첨(伯瞻), 호는 석음와(惜陰窩). 이영인(李榮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사익(李士益)이다. 아버지는 이후망(李後望)이며, 어머니는 송담조(宋覃祚)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96년(숙종 22) 사마시를 거쳐 순안현령을 지내다가, 1705년 알성문과에 장원하고 지평이 되었다. 1710년 3월에 지평 이방언(李邦彦)과 함께 소론 최석정(崔錫鼎)을 공격, 배척하여 관작을 삭탈하게 하고, 저서 『예기유편(禮記類篇)』을 불사르게 하였다.

유생 곽경두(郭景斗)가 최석정의 유배를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자, 홍우서(洪禹瑞)·이택(李澤) 등과 함께 곽경두를 옹호하다가 정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12년 이후 정언·좌승지·황해도관찰사·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720년(경종 즉위년)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12월 김일경(金一鏡)의 소(疏)가 있자 흉참(凶慘)하다고 지적하고, 이 때 소론이 득세하여 송시열의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철폐하자 이를 통탄하여 항변하였다. 신임옥사가 일어나자 경산에 정배되었다가 동래에 이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득세로 풀려나와 예조참의·도승지·대사간·형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 때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 대사헌의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지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도곡집(陶谷集)』
집필자
오갑균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