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顯), 호는 행정(杏亭).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이유성(李惟誠)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이득궤(李得蕢)의 딸이다.
청송 노래산(老萊山)에서 태어났으나 6세에 부친상, 9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외삼촌인 이대기(李大期)에게 양육되었다. 이대기에게 학문을 배우고, 뒤에 성안의(成安義)에게 수학하였다.
1617년(광해군 9) 향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618년에 과거에 응시하였다.
이때 폐모론이 대두되자, 탄식하면서 과거를 포기하고 경학 공부에 힘썼다. 1626년(인조 4) 군자참봉(軍資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직하고, 장유(張維)가 제용감주부로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 겸 수륙군향차원(水陸軍餉差員)에 제수되어 북진하다가 조령에 이르러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 청원에 조그만 집을 짓고 행정이라 이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소강절(邵康節)의 시 「안분음(安分吟)」을 벽에 적어놓고 후학들을 격려하였다고 한다. 1639년 창평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유학을 진흥시키는 데 힘썼으며, 하홍도(河弘度)·강헌지(姜獻之) 등과 교유하였다. 1680년(숙종 6)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저서로는 『행정유고(杏亭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