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이서(吏胥)로서 태종(太宗)을 잠저(潛邸) 때부터 섬겼으며, 태종이 즉위한 뒤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일등에 기록되었다. 세종대에 이르러서도 삼번절제사·의금부제조·경시서제조·판원주목사·판홍주목사·형조참판을 거쳤다. 1435년(세종 17)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임명되었으나 굶주린 백성들이 도시에 3일 동안이나 빌어먹었는데도 그들을 능히 검거하여 진휼하지 못했다고 하여 파직당하였다. 1439년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고 이 후 나이 70이 지나 치사(致仕)하고 고향인 석성현(石城縣)에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다른 능력은 없었으나 다만 뛰어나게 총명하고 일을 하는 데 부지런하여 비천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직위가 2품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를 경호(敬胡)라 하여, 일찍 일어나서 공손히 섬기는 것이 경(敬)이고, 나이 많도록 장수하는 것이 호(胡)라고 하였다.
아들이 5인이 있었는데, 전가생(田稼生)과 전동생(田稠生: 일명 田秱生)은 과거에 올랐으며, 전수생(田穗生)은 아버지의 음덕으로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근신할 줄 모르고 불의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다가 부처(付處)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