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명은 Ilisha elongata BENNETT이다. 몸이 측편(側扁)하고, 몸빛은 등은 암청색이고 배는 은백색이다. 아래턱이 위턱보다 길게 나와 있다. 배지느러미는 작고 뒷지느러미가 상당히 길다. 몸길이는 50㎝ 내외이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에 많이 분포한다. 6, 7월경에 큰 강의 하류나 하구 부근에 내유(來遊)하여 산란한다. 준치는 시어(鰣魚)라고도 하고 진어(眞魚)라고도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진어가 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경기도·평안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여러 지방에서 진어가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준치는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많이 어획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준치를 시어라 하고, 그 속명(俗名)을 준치어(蠢峙魚)라고 하였다.
그리고 준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크기는 2, 3자이고, 몸은 좁고 높다. 비늘이 크고 가시[鯁]가 많으며, 등은 푸르다. 맛이 좋고 산뜻하다. 곡우가 지난 뒤에 우이도(牛耳島)에서 잡히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점차 북상하여 6월 중에 해서에 이르기 시작한다. 어부는 이를 쫓아 잡는데 늦은 것은 이른 것만 못하다. 작은 것은 크기가 3, 4치[寸]이며 맛이 매우 박하다.”
준치는 맛이 있는 물고기이기는 하나 살에 가시가 많은 것이 흠으로 지적되어 왔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전어(箭魚)의 맛은 상품(上品)이나 날카로운 뼈가 많아 방심하고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그 뼈를 추리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는 준치를 시(鰣)라 하고 한글로 ‘준치’라고 기재하고 있고, 그것이 내유하는 시기가 있어 항상 4, 5월에 내유하므로 시(時)자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통속적으로 이르는 진어가 그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준치 어업은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히 성하여서,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제1집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은 준치를 기식(嗜食)하여 그 수요가 많으므로 이를 많이 어획하고, 중국인도 평안도 근해에 내어(來漁)하여 이를 잡아간다고 하였다.
어구는 건망(建網)과 연승(延繩) 및 유망(流網)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총어획량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이 1928년의 2,685M/T이고, 광복 이후에는 1976년의 7,177M/T이 최고기록이었다. 1986년에는 4,722M/T이 어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