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독도
자연지리
개념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작은 육지.
내용 요약

섬은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작은 육지이다. 바다·호수·강 내에 존재하며 도서라 고도 한다. 간척·매립되었거나 방파제·방조제·교량 등으로 연륙된 도서와 제주도 본도는 섬에서 제외된다. 주로 서남해안에 집중되어 있으며 섬의 수는 3,153개에 이른다(1994년 말 기준). 역사적으로는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국방상 중요한 역할을 했고 유배지로도 이용되었다. 육지와 고립된 탓에 생활·언어·민속에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경제적 가치가 높은 자원들이 산재해 있고, 퇴적작용으로 해안에 형성된 넓은 간석지는 세계적으로도 귀중한 자산이다.

정의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작은 육지.
개관

대양(大洋) · 내해(內海) · 호소(湖沼) · 대하(大河) 등의 수역에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부른다. 세계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762만 7000㎢) 이상의 큰 육지는 대륙이라 부르고, 그린란드(217만 5600㎢) 이하의 육지는 섬이라 한다.

지각운동에 의하여 해저의 일부가 융기하거나, 해안산맥의 일부가 침수되어 높은 땅의 일부가 해면 위에 남아 있거나, 또는 육지의 일부가 침강하여 그곳에 해수가 들어와서 섬이 형성된다. 해저화산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화산도(火山島)나 해안 지역의 일부가 파도와 빙하의 침식을 받아 육지와 분리되어 만들어진 섬도 있다.

바다에 있는 섬은 육도(陸島)와 양도(洋島)로 나누어진다. 육도는 지질적으로 대륙과 같은 구성 물질로 되었으며, 육지의 일부가 대륙이나 또는 대륙에 가까운 큰 섬에서 분리되어 형성된 섬이다. 양도는 육지와 관계없이 생성된 것으로서 화산섬과 산호섬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 섬은 만조 때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을 말하며, 현재 간척(干拓) · 매립되었거나 방파제 · 방조제 · 교량 등으로 연륙된 도서와 제주도(濟州道) 본도(本島)는 섬에서 제외된다.

유인도서(有人島嶼)는 민간인이 생활 근거를 두고 연중 계속적으로 생업을 영위하면서 거주하는 도서를 말한다. 어업이나 농업을 목적으로 작업 기간에만 일시적으로 거주하거나 전략상 군경만이 주둔하고 있는 도서는 제외된다. 군청이 소재하는 도서를 군도(郡島), 읍 또는 면사무소가 있는 도서를 읍면도(邑面島), 그리고 군도와 읍면도를 제외한 도서를 낙도(落島)라고 부른다.

섬의 분포

우리나라의 도서 총수는 3,153개(1994년 말 기준)로 그 중에 유인도는 464개(15%), 무인도는 2,684개(84%)이다. 유인도의 가구수는 8만 2689가구, 인구는 25만 5487명, 그 면적은 1,842.8㎢이다. 그러나 방조제 공사 및 연륙교 건설로 인해서 유인도의 수는 매년 감소하고 있다.

면적별 5대 도서는 제주도(1,845.88㎢), 거제도(378.14㎢), 진도(363.16㎢), 남해도(357.28㎢), 강화도(305㎢)이고, 인구 규모별 5대 도서는 제주도(53만 4715명), 거제도(16만 8168명), 강화도(6만 992명), 남해도(5만 4004명), 진도(4만 3887명)이다. 강원도는 도서의 수도 적을 뿐만 아니라 유인도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섬 수의 도별 순위는 전라남도 · 경상남도 · 충청남도 · 경기도 · 전라북도의 순이며 군별로는 신안군(829개) · 여수시(316개) · 진도군(230개) · 완도군(201개) 등인데, 전부 전라남도에 속한다.

섬과 육지와의 거리별로 보면 4㎞ 이내의 섬이 136개(29.3%), 12㎞ 이내의 섬은 92개(19.8%), 20㎞ 이내는 75개(16.1%), 40㎞ 이내는 91개(19.6%), 80㎞ 이내는 48개(10.3%), 80㎞ 이상은 30개(6.5%) 등이다.

섬의 자연환경

제주도 · 울릉도 · 독도 등의 화산섬을 제외한 여러 도서는 해수의 침수작용으로 육지와 분리되어 육지의 높은 부분이 섬으로 되었다. 따라서 섬의 경사는 일반적으로 급하며 평지가 적다.

다만 해안에 조류 및 해류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넓은 간석지가 서 · 남해안 도서에 나타난다. 서해안의 도서 지질은 선캄브리아기의 암석인 규암 · 석영편마암 · 편마암과 백악기 초기의 화강암류 · 각력암 · 석영반암 등이 많다.

남해안의 도서들도 주로 선캄브리아기의 편마암류로 되어 있다. 추자군도의 여러 섬들은 주로 석영반암으로 되어 있고, 규장암(硅長岩) 및 염기성 암맥이 곳곳에 관입하여 있다. 제주도 남쪽의 마라도에는 현무암이, 가파도에는 안산암이 분포하는데 모두 제4기에 속하는 암석이다. 울릉도는 이중화산으로서 열하분출과 중심분출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칼데라(caldera)를 가지고 있다.

화산분출 시기는 초기 올리고세에서 플라이스토세에 이르며 주된 구성 암류는 현무암 · 조면암 · 안산암이다. 섬 중앙에 성인봉(983m)이 있고 본도에서 가장 넓은 나리분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섬지역의 기후는 해양의 영향으로 한서의 차가 작고, 연중 기온의 변화가 적으며,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것이 특색이다. 제주도의 연평균기온은 15℃, 남해안 지방은 13∼14℃, 울릉도의 연평균기온은 12℃로 나타난다.

연강수량도 제주도의 남동해안지역은 1,800㎜ 내외로서 전국 최다우지이며, 남해안지역은 1,500㎜에 달한다. 울릉도는 1,400∼1,500㎜의 많은 강수량을 보이고 있는데, 이 섬에서는 여름철의 강우량보다 겨울철의 강설량이 더 많은 것이 특색이다.

한반도 남서도서지방에는 난대림인 동백나무 · 북가시나무 · 가시나무 · 녹나무 · 참식나무 · 감탕나무 · 팽나무 등의 상록활엽수림이 자생한다. 제주도 한라산의 남쪽에는 난지식물(暖地植物)의 종류가 많고, 울릉도는 북위 35°30′에 위치하나 해양성기후의 영향으로 상록활엽수가 분포한다. 난지식물인 동백나무 · 참식나무 등은 해류를 타고 북상하여 황해도의 여러 섬에까지도 분포한다.

섬의 역사와 문화

섬의 역사

강화도 · 제주도 · 진도 등과 같은 섬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어 오래 전부터 인간이 거주했고 문화전파의 통로가 되어왔음을 알게 한다.

역사상 섬은 해상 활동의 근거지로, 국방상 중요 방어 지역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신라 말 당나라 해적들의 약탈이 심해지자 장보고(張保皐)는 828년(흥덕왕 3)에 완도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해적의 출몰을 제압하여 서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당나라와 일본 간의 해상무역을 관장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신라 말기와 고려 초에 당나라의 해적, 여진의 침입과 특히 13∼16세기에 걸친 왜구의 침입으로 울릉도 · 진도는 한때 공도(空島)가 되었고 섬주민의 피해는 극심하였다. 그러나 섬은 국방상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강화도는 1232년(고종 19)에 몽고군의 침입에 장기 항전하기 위하여 약 39년간 고려의 도읍이 되었다.

강화도는 개경에 가까운 섬으로 천연의 요새여서 육전에는 강하나 해전에는 경험이 없는 몽고군을 무찌르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뒤 강도(江都)라 부르게 되었고 이때부터 몽고와 장기전을 치렀다. 강화도로의 천도는 섬을 방어지로 해서 나라를 지킨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삼별초(三別抄)도 강화도 · 진도 · 제주도 · 남해도 · 거제도를 중심으로 몽고군에 항거했다. 특히 1270년(원종 11)에 진도에 용장성(龍藏城)을 쌓고 궁정을 조성하여 하나의 도성을 이루었다. 진도를 중심으로 항몽의식이 고무되고 남해안의 여러 섬과 연안 지역에서 항몽 투쟁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지역에는 많은 유물 · 유적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다. 한산도는 주위에 도피할 곳이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항거하게 되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곳으로 이곳에서 이순신(李舜臣)은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를 이루었다. 병자호란병인양요 · 신미양요 때에도 강화도는 국방상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섬은 유배지로 많이 이용되어 제주도의 김정희(金正喜), 보길도윤선도(尹善道), 강진정약용(丁若鏞) 등은 유배지에서 활동하여 섬 문화 발달에 기여했고 이른바 유배지 문화가 형성되었다.

계속되는 왜구의 침입으로 조정에서는 고종 때까지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시행하였다. 즉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집단으로 육지에 이주시키고 섬에는 주민이 없도록 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서남해 연안도서에 거주하는 현재 주민들의 조상은 대략 임진왜란 이후부터 서서히 입도(入島)하기 시작하였다. 울릉도의 경우는 1884년(고종 21)에 고종이 공도정책을 버리고 울릉도 개척령을 공포하여 이민을 장려함으로써 정식으로 이주가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섬은 본토에서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고, 평지가 적어서 농산물 생산도 부족하여 항상 기근에 시달린다. 또한 낙후된 어로 장비 등으로 소득이 낮고, 교육 · 문화 등의 혜택이 적어서 미개발 지역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섬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활발해졌다. 최근에는 전기 가설, 무의촌 일소, 정기선 또는 명령항로 개통 등의 도서 개발이 활발해지고 있다. 정부에서도 「도서개발촉진법」을 제정하여 본격적인 도서개발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도서의 고립성 · 낙후성 및 교육 · 의료 등의 문제 때문에 본토로 이주하는 이도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섬의 문화

섬에 문화라는 인간의 삶의 형태가 생기려면 사람이 있어야 한다. 무인도라 하더라도 수산물이나 농산물 같은 자원이 나오거나 등대 · 초소 · 국방시설 · 관광시설 등이 있다면 한때나마 섬의 문화가 생긴다.

유인도로 지속이 되는 섬이 있는가 하면 이전에 사람이 살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지금은 무인도가 된 경우도 있고, 얼마 전에 입도하여서 아직 섬의 문화라고 부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문화적 특성을 말하려면 100여 년 이상의 역사가 있는 섬과 섬사람을 전제해야 한다.

섬의 지리적 성격은 육지와 떨어진 외딴 곳이며 반드시 육지나 이웃 섬에 가기 위해서는 배와 같은 교통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섬의 자연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현실적이며 실리적인 생활 방식 또는 생존 형태가 독특하게 형성이 된다. 이리하여 그 섬만의 문화적인 특성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중앙의 문화가 어떤 경로로 들어오면 그곳에 정착하여 섬 사정에 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그래서 섬의 문화에는 폐쇄성과 독자성이 드러난다. 과거에는 바다 때문에 육지 문화의 전파가 지연되고 섬 문화의 육지로의 진출도 쉽지 않아서 섬은 문화적으로 고립되고 자체의 순수성이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그래서 섬은 인종적 · 민속적으로 사이가 동떨어져 연락이 끊어지는 격절성이 나타났으며 전통적인 습관과 풍습이 많이 남아 있어 과거를 비교, 연구하는 데 좋은 대상이 되었다.

섬의 언어

섬이 육지 가까이 있고 왕래가 빈번하며 인구가 많지 않으면 섬의 특색 있는 언어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 경기만 · 태안반도 · 다도해 섬의 언어는 육지와 별반 차이가 없지만, 육지와 멀리 있고 규모가 큰 제주도는 독특한 언어현상이 생겨서 대화가 안 될 정도이다.

그곳 학교에서는 표준어 교육을 강조하고, 육지에 나온 도민은 새로이 표준말을 익혀야 하는 노력을 해야 하며 섬 고향말과 서울 표준말을 다 구사하면서, 필요에 따라 어휘와 어미를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

제주도 수수께끼 중에 “준준ᄒᆞᆫ ᄆᆞᆯ에 짐 하영 식겅 놔두는 건 뭣고?(여윈 말에 짐 많이 싣고 놔두는 것은 무엇인가?)”가 있다. 여기에서 말[馬]은 고어 형태 ‘ᄆᆞᆯ’이며, ‘준준ᄒᆞᆫ, 하영, 식겅’은 표준어가 아닌 것이다. 이를 통해 제주도 언어의 특성을 알게 된다.

진도 방언에서 여러 아들이 있을 때 큰놈(장남) · 둘째놈 · 간뎃놈(차남) · 시바(삼남) · 니바(사남) · 오바 · 육바 · 칠바라고 ‘바’ 자를 넣는다. 출산할 때 먹을 복을 많이 받도록 하는 습속으로 솥뚜껑에다가 아이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 아이 이름은 ‘소드랑바’라고 부르며 장사하는 남자는 ‘장씨바’, 귀머거리 남자는 ‘먹바’라 한다. 진도에서 어린아이가 많이 모여 노는 곳에 가서 가령 “니바야(넷째야)”라고 부르면 여러 명이 함께 대답을 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이 ‘바’는 먹보 · 울보 같은 ‘보’와 비슷한 것이기에 진도 방언은 주목을 받는다.

섬마다 곳곳에 지명이 있어서 섬 지명 연구가 또한 섬의 풍속 · 역사 · 방언 체계를 고찰하는 데 중요하다. 또한 고기를 잡는 고장이므로 육지에서 잘 알지 못하는 고기가 많고 이 고기를 가리키는 말이나 고기 부분 명칭, 그리고 고기 잡는 기구, 고기잡이 행동, 배에 관한 어휘, 날씨에 관한 말 등은 매우 많다.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성남도(城南島)에서 “섬을 산다.”는 말은 섬 전체를 개인 소유로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각 어촌이 공동으로 관리하며 어로 채취를 하는 무인도를 음력 11월경에 일 년 기한으로 입찰을 통하여서 임대하는 개인 소유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인도를 한 해만 사서 미역 같은 것( · · 앵초 · 천초 · 뱅포 · 파래 등)을 채취한다는 뜻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智島)에는 소금 만드는 데 화염(火鹽)과 천일염이 둘 다 있는데 화염 제조에 관한 시설과 도구를 들면, 벗(화염을 만들 수 있는 곳) · 벌(소금을 만들 주재료, 뻘흙) · 섯등(말린 벌을 쌓고 갯물을 자주 부어서 염기가 높은 염수를 만드는 시설, 석구단) · 덕(가마솥이 사용 중에 밑으로 주저앉지 않도록 소나무를 박아서 설치함.) · 써끄뎅이(배수로) · 오리담(바닷물이 괼 수 있도록 파 놓은 웅덩이) · 써우레(써레) · 개비와 미래(가마에서 소금을 모으는 도구) · 송쿠리(소쿠리)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독특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섬의 언어는 특색을 많이 잃어가고 있다. 강화도 · 거제도 · 진도 · 계화도 같은 곳에 다리가 놓여 연륙이 되면서, 또는 간척사업으로 섬이 육지에 포함되면서 생활 전체가 변모함에 따라 언어도 변하였다.

또한 표준어 보급, 육지에 출입하는 섬사람과 섬을 방문하거나 와서 정착한 외지인과 혼합이 되자 섬의 언어특색은 급속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과거에 섬에 귀양와서 눌러산 서울 고관의 후손이 보유하였던 긍지 높은 가문 언어와 풍습의 보존도 희미해져 간다.

섬의 민속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섬사람의 민속은 ‘생존과 생활의 방법과 멋’이라고 할 만하다. 자연현상을 관찰하여 살아가는 데 이로움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강하였던 것이다. 민속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① 바람신앙

바닷바람은 섬에 사는 사람이나 바다에 나가서 고기 잡는 사람, 물속에 들어가서 채취하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것이다. 바람이 왜 생겨서 언제 불며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생존 문제가 제기된다.

제주도는 음력 2월 중 ‘영동할아버지’를 위하여 제사지내는 영동제가 있다. 옛날에 한 포목장사가 외국에서 제주도로 돌아오다가 지금 한림 앞바다 근처에서 태풍을 만나 익사하였는데, 그 시체가 네 쪽으로 찢겨서 머리는 한림읍 협재, 몸뚱이는 한림읍 명월, 그리고 손과 발은 고내와 애월에 각각 표착하였다고 한다. 이 상인이 영동할아버지인데 그의 명복을 빌어주면 해상 사고를 막을 수 있고 곡식도 풍성해진다고 해서 해마다 2월 초하루부터 보름간(요즘은 줄여서 3일간) 제사를 지낸다.

이때는 일손을 놓고 빨래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기고 한다면, 농사는 흉작이 되고, 빨래는 구더기 투성이가 된다고 한다. 그러니 누가 이 금기와 근신이 따른 제사를 거역할 것인가? 2월 보름에 볏짚으로 배를 만들어서 오색단장을 하고 여러 가지 제물을 조금씩 실어 먼 바다로 띄워 보낸다. 영동할아버지가 떠나는 것인데 이때 동북풍이 불면 영동의 넋이라고 전해 온다.

이 풍습 내력에서 풍신(風神)은 반드시 있어서 왔다가 가는 것이며,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그 피해지가 바람이 처음에 도착하는 네 군데인데, 정성(기도 · 금기 · 노력 · 예비)이 지극하면 그 피해를 줄일 수 있으니 해마다 잊지 말고 대비하라는 내용이다. 2월 영동신앙은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육지에서는 남부, 그 중 다도해를 중심으로 한 도서지방이 심한 편이다.

중서부 해안에는 10월 20일경에 부는 손돌바람[孫乭風]이 있다. 고려 때 전란이 나서 왕이 강화도로 파천할 때 지금 손돌목이라고 부르는 통진(通津)과 강화 사이에 이르자 바람이 크게 일었다. 왕을 태운 배를 저어가던 사공 손돌이 쉬었다 가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의심을 하고 손돌을 죽이려 하자, 바가지를 바다에 띄우면서 “제가 죽더라도 저 바가지가 흐르는 대로만 따라가십시오.”라는 유언을 하고 죽었다. 과연 그대로 하여 살아난 왕은 말의 목을 베어서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이 무렵의 추위를 손돌추위, 이때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한다.

이것은 해마다 닥치는 한파를 설명하는 것으로, 지배층이라도 현지 주민의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수용해야 된다는 것, 어려움을 겪으며 사는 바닷가 백성을 이해해 달라는 것, 반드시 닥치는 한파에 미리 미리 대비해 두어야 한다는 것 등의 뜻이 담겨 있다.

② 용왕굿

바람을 위한 영동할아버지, 또는 영동할머니 제사 외에 평소에 바다에서 사는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용왕굿은 부락 공동 제사인데 결국 안전과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것이며 제주도의 경우 2, 3일씩 굿을 한다.

먼저 초감제(初監祭)라는 굿 시작 의식이 있고 다음에 바닷가에 나가서 용왕을 흥겹게 맞이하는 용왕맞이라는 의식이 있다. 그리고 씨드림이라 하여 바닷가에 나가서 부인들이 바다에 쌀(오곡)을 한 줌씩 한 줌씩 이리저리 바다에 뿌린다. 곡식의 씨를 뿌림은 소라 · 전복 · 미역이 잘 자라라는 것이니 곧 농업과 어업의 결합 의식이라 하겠다.

씨점이라 하여 돗자리에 쌀을 뿌려서 그 모양으로 점을 치기도 한다. 다음은 한지에 밥 · 나물 · 달걀 · 과일 같은 제물을 주먹만 하게 싸서 여러 개를 만들어 바다에 던진다. 이것은 사해용왕, 바다에 나가서 죽은 가족, 객사한 사람 등을 위한 제물이다. 그리고 조그마한 배를 멀리 띄워 보낸다.

황해도의 무속인 ‘배연신굿’이 그곳 출신인 김금화(金錦花) 무녀에 의해서 해마다 인천 부두에서 실시되는데 이것도 결국 풍어와 안전을 위한 용왕제인 것이다.

③ 어장고사와 뱃고사

전라남도 진도군 신의면 접도리 수품부락의 경우, 어장고사는 돼지머리와 그 어장에서 나는 고기(제주도는 가리지 아니한다.) · 떡 · 술 · 국 · 밥 · 그물을 설치하고 제주가 “목욕 정제하고 용왕님께 성의껏 올리니 많이 잡히고, 무사하며, 종업원도 협조하여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두로 기원하거나,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한다. 물론 효험이 있다고 믿는다.

현재 해안 및 섬지방에서 풍어를 기원하는 공동 제의로는 동제와 별신제(別神祭)가 있는데 이것은 풍어와 마을의 평안과 무사고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개인 제의로는 뱃고사와 뱃굿이 있어 선주 각자가 배에 모시고 있는 배서낭에게 배와 선원의 안전 및 풍어를 기원한다.

뱃고사는 정초와 추석 같은 명절이나 용골 앉힐 때(처음 배를 만들기 시작할 때), 진수식, 첫 출어, 첫 어획, 큰 고기를 잡았을 때, 풍어 · 흉어 때에 거행한다. 특히 배를 새로 사서 띄우는 진수식을 할 때는 어장에서 오색기를 두고 제사를 지내며 배 안에도 당거리(배의 중심인 조타실 안쪽, 신주를 모신 곳)와 기관실 · 선두 · 선미에 음식을 차려둔다. 물론 값나가는 고기가 잘 잡히고 안전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예전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사토리에서 지냈던 뱃고사는 항구에서 제사를 지내고 떠날 때 친구들이 소주를 선물로 주며 새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고기가 잘 잡힐 곳에서 “용왕님 잡수시고 고기 잘 잡히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원한다. 섬에는 크건 작건 배가 재산이며 수입 근거이기에 이러한 진수식이나 풍어 · 흉어 때, 또는 설날 · 정월보름 · 추석 등의 명절에 뱃고사를 지낸다.

④ 당제사

어촌도 농촌과 다름없이 촌락마다 촌락 수호신을 모시고 있다. 촌락 수호신에 대한 당 제사를 거행할 때는 배들이 귀항을 서둘러서 당 제사에 참가한다. 섬에서는 당집을 짓고 안전과 풍어를 비는데, 물론 당에는 당신(할머니 · 노인 · 장군 등)이 있다. 심지어 뱀이 신체(神體)가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어떠한 경로로 당신이 되었으며 어떻게 섬에 이로움을 주었는가 하는 내력이 전설이나 무가(巫歌)로 전해오는 것이다.

인천광역시 연평도임경업 장군사당(林慶業將軍祠堂, 忠愍祠)은, 조선 광해군 때 임경업이 중국에 갈 때 연평도에 머물면서 가시로 항구 입구를 막아서 조기를 잡게 된 내력을 근거로 해서, “우리 연평도의 조기잡기를 시작한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여 모셔오며 이 일을 주관하는 무당할머니가 지금도 살고 있다. 연평도를 시발점으로 하여 서해안 일대는 임경업을 어업신으로 섬기며, 서해안 뱃노래에는 반드시 임경업의 은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⑤ 개인제사

섬을 처음 개척한 사람을 섬사람이 모두 섬기는데(제주도 삼성혈 제사), 귀양을 왔든지, 생활을 위한 것이었든지 섬에 들어온 입도조(入島祖)를 제사하는 문중 제사가 있다. 흉년이 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그 지역 국회의원이 식량을 대주어서 살게 되었다면 그 국회의원이 은인인 까닭에 제사의 대상이 된 예도 있다. 결국 세시풍속까지 포함한 섬의 민속은 생존과 생활의 방법과 멋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 · 예술에 표현된 섬

섬이 아니면 보고 듣고 생산하기도 어려운 예술세계를 특색을 들어 정확하게 제시하기는 어려우나 그 실례는 허다하다. 대략 표해록(漂海錄) 계열 · 설화 · 민요 · 속담 등으로 요약된다.

표해록

파선을 당한 배가 대양에서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건을 기록한 표류자의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바다와 악전고투한 모습도 있고, 표착한 이국의 풍물 제도와 견문을 일기체로 쓴 기행수필과 비슷한 형태도 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인 최부(崔溥)가 1487년(성종 18) 경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도에 부임하였다가 1488년 정월 부친상을 당하여서 급히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부(寧波府)에 표류되어 온갖 고생을 하고 반년 만에 귀국했는데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경험과 견문은 당시 상당한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표해록』에 기록된 수차(水車)의 제작과 이용법은 한발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1488년에 3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조선 영조 때 제주도 사람 장한철(張漢喆)은 1770년(영조 46) 12월 25일 28명과 함께 육지 상륙 직전에 태풍을 만나서 유구열도(琉球列島)의 한 무인도에 표류하였다가 닷새 후에 안남(安南) 상선에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이때 10명만 생환하였는데, 이 기록은 1970년대에 발굴되었다.

또, 1745년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牛耳島)에 입도한 문일장(文日章)의 사대손인 문순득(文淳得)과 일행 5명은 태사도라는 섬으로 홍어를 사러 갔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유구열도의 중산도(中山島)에 도착한 후 여러 섬을 다니며 지내다가 1802년(순조 2) 10월 7일에 귀국의 뱃길에 올랐다. 그런데 다시 태풍을 만나 이번에는 필리핀 여송도(呂宋島, 루손섬)에 표류하였다. 일행 중 4명은 귀국하고 저자인 문순득과 김옥문(金玉紋)은 중국 광둥(廣東)의 장삿배를 타고 오문(奧門,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 황성을 거쳐 1805년 1월 8일 집에 돌아왔다.

이때의 경험을 일지로 써 충실한 기행문 성격도 띤 이 『표해록』은 원래 문순득이 당시 신유박해로 흑산도에 귀양와 있던 정약전(丁若銓)에게 구술하여 대강 쓴 것이 1차 『표해록』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자세히 보완한 것이 유암(柳庵)이 쓴 2차 『표해록』이다. 1984년에 발굴, 소개되었다.

이러한 우리나라 사람의 표류기와는 반대로 네덜란드인 하멜(Hamel,H.)이 제주도에 표착하여 14년 동안 우리나라에 억류된 기록인 『하멜표류기』가 있다. 표류 사실은 많을 것이나 이를 문서화하거나 구술한 것이 발굴된 것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앞으로 발굴, 조사에 의하여 더 드러날 것이며, 우리나라 사람의 표류기는 외국 문물이, 외국 사람의 우리나라 표류기는 우리나라, 특히 섬의 문물이 당시 모습으로 역력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섬의 설화

각 섬의 입도조 설화, 개도신화(開島神話), 장수나 무당 등 독특한 인물의 전설은 섬 자체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한다. 제주도에는 「설문대할망설화」가 전해오는데 설문대할망은 키가 큰 거대한 여신으로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를 놓으려 했으나 그가 먹고 입을만한 자원이 없어서 실패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상과 현실, 소원과 실망의 교차가 절실하게 나타난 내용이다.

이 전설의 속뜻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당시 여건으로는 실패라고 하였으나 오늘날 교통 수단이 발달함으로 그 실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설문대할망설화」는 거녀담(巨女談)의 일종인데 제주도의 지리적 조건에 알맞게 윤색된, 향토색이 농후하게 반영된 설화이다. 이 설화를 통하여 제주도의 풍토와 제주도민의 소원과 현실을 느끼게 한다.

전라북도 변산반도 일대에도 바닷물이 무릎 밖에 차지 않는다는 「여자거신설화」가 있는데 이런 예는 섬이나 해안에서만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육지에서는 소멸된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고대 형태의 신화나 무가(巫歌)가 제주도 같은 섬에 전승이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제주도의 무속 중, 굿을 처음 시작할 때 온갖 신을 초청하는 초감제라는 절차에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천지개벽 신화인 「천지왕본풀이」가 그 좋은 예이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난 아기장수를 보고 부모가 장차 커서 역적이 될 것이라 하여 죽였고, 그때 용마가 연못이나 산에서 나타나 슬피 울다가 또한 물에 빠져죽었다는 「아기장수전설」은 제주도나 진도 · 울릉도에서 모습을 달리한다.

아기장수가 죽지 않고 역적도 되지 않으며, 나라에 조금 큰일을 하는 중간 영웅 또는 중간 관리 정도의 일을 한다. 살려준 대신 역적이 되지 않는다는 절충형으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인재가 드물고, 어떻게 하든지 고난을 이기고 살아가야 하는 섬사람들의 타협과 생존의 의지를 뜻한다고 하겠다. 육지에서 아기장수로 지목되어 겨드랑이 날개가 잘려진 장수가 탈출하여 울릉도의 입도주(入島主)가 되었다는 전설도 같은 계열이다.

비가 와서 천지가 물에 잠길 때 섬의 산꼭대기만 조금 남았다는 우리나라 최다분포의 「홍수전설」은 육지나 섬이나 마찬가지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도창리의 승봉산(升峰山), 이웃 섬인 자은면 구영리의 두봉산(斗峰山), 울릉도의 갈미봉이 그 예이다. 대홍수를 만났을 때는 섬이나 육지나 다 마찬가지로 생존 의지에 빠져들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섬의 민요

민요는 노동과 관련하여 민중에 의하여 형성되고 환경에 따라서 그 곡이나 내용이 언제나 변할 수 있는 유동성이 있기 때문에 섬의 환경적인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다른 문학에 비하여 서민들의 숨김없는 생활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섬의 민요는 사해용왕을 불러가며 안전하기를 바라는 것과 이런 고단하고 위험한 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는 신세 한탄이 있는 것, 죽더라도 안전한 곳으로, 그보다 살아서 저 이상향(제주도의 이어도)에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것, 임경업 장군이나 용왕신의 덕분에 고기가 잘 잡혀서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섬의 자장가에도 육지 자장가보다 어머니의 한탄과 소원이 잘 나타난다. 뱃노래와 고기잡이노래는 지역에 따라서 그 곡조와 가사가 다르다.

어업 노동요로는 「뱃노래」 · 「고기후리기노래」 · 「그물당기기노래 」 · 「해녀의 노래」 등 다양하게 발견된다. 해녀 노래 중에 그 내용을 보면 “우리 부모 날 낳을 적에/ 무슨 날에 낳았던고/ ……내려갈 땐 눈물이요/ 올라올 땐 한숨이네.”로 한탄조이다. 섬이라고 해서 다 어업에 치중하는 것은 아니며 농토가 있으면 되도록 농사를 짓고자 한다.

어업보다 농업을 더 숭상하여 섬인데도 어업이 발달하지 않은 섬도 많다. 따라서 농업민요는 육지와 별반 차이가 없다. 제주도에는 아직도 「밭밟기노래」 · 「나무깨는 노래」 · 「따비질노래」 등의 노동요가 남아 있어 전승 문화의 잔존형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섬에는 특산물이 있어 서울 궁중에 진상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도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므로 특산물 재배를 기피하는 예가 있었고 이에 따른 설화나 민요도 있었다.

섬의 속담 및 기타

속담이나 수수께끼 · 속신어도 사회적 소산이어서 섬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전라남도 해안 및 도서지방에는 속신어로 “나비가 날기 시작하면 복어를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봄 나비가 날아다니는 2월부터 4월 사이는 복어의 독성이 매우 강해지고 온 몸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고기 못 잡은 선장 배 나무란다.”는 속담은 육지의 “서투른 목수 연장 나무란다.”와 같은 말이다.

조수간만의 일자를 부르는 낱말은 섬마다 대동소이한데, 서해안에서는 그 차이가 심한 편이다. 바람 이름도 4방향, 8방향에 따라 대동소이하여서 구체적인 대화나 구비문학에서는 혼동이 일어난다. 동풍은 샛바람 · 셋바람, 남풍은 마파람 · 마바람, 서풍은 늦바람, 북풍은 하늬바람 · 높바람이 기준이 되며 그 사이에 있는 동남 · 동동남 · 동남남풍의 이름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 구비문학 연구에 있어 주의를 요한다.

섬사람이 육지에 가거나 배를 탈 때 이런 것은 좋고 이런 것은 나쁘다는 민간속신은 대단히 많아서, 동 · 남 · 서해의 섬사람끼리 통하지 않을 때도 있고, 육지 사람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평소에는 괜찮은 일도 제사 때나 고기잡이 나갈 때는 안 되는 것도 있다. 예컨대 울릉도에서 “오징어를 잡으러 갈 때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 “고기잡이 할 때나 고기 잡으러 가는 길에 불(담뱃불 같은 것)은 빌려주지 않는다.”와 같은 것은 평소에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생사운명을 걸고 나갈 때 인사란 신이나 대자연에 대하여 부정한 것이며 남과 나의 안녕 여부를 말할 계제가 아니라는 비장한 상황이기에 금기가 된 것이다. 불은 이사갈 때 불 갖고 가기, 화롯불 지키기에서 보듯이 재수를 뜻하므로 고기잡이 갈 때 미리 재수 · 행운을 도둑 맞을까 봐 불주기를 꺼리는 것이다.

이러한 섬의 언어현상은 하나하나 생활상의 깊은 속뜻을 가지고 표출한다. 어로민속분야에서는 국내의 해안과 도서를 비교 연구하며, 나아가 우리나라와 일본 및 중국 해안의 어로 방법 · 어로 기구 · 민속 · 민요 · 설화 등을 비교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고유 풍속이나 전승 물질 자료는 생업 · 학문 · 관광 등의 측면에서 보존되어 연구 및 소개되어야 한다.

섬 주민의 생활

섬 주민의 의생활

섬지방이라고 해서 다른 지방과 의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적으로 남자는 하의(下衣)로 바지를 입는데, 겹바지 · 솜바지 · 홑바지 등 계절에 따라 두께가 다르다. 여자도 바지를 입지만 옷을 짓는 방법이 남자용과 다르다. 여자의 아래옷은 속곳과 단속곳(완도의 방언)이 있다. 속곳은 속에 입는 옷으로 다리통이 넓고 밑이 막혀 있다. 속곳 위에 바지를 겹쳐 입는다.

바지는 가래바지라고도 하는데 밑이 터져 있다. 바지 위에 단속곳을 입고 맨 위에 치마를 두른다. 남녀 모두 웃옷으로 저고리를 입는다. 남자 것은 길고 여자 것은 짧다. 요즘은 점차로 전통적인 의복이 사라지고 활동하기에 편리한 기성복을 많이 입는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백의(白衣)를 많이 입었고, 섬에서도 역시 흰옷을 많이 입었다.

그러나 지리적 조건과 생활 풍습이 특이한 제주도에서는 감물염색[枾染]의 옷을 많이 입었다. 덥고 습기 많은 기후에서 생활하는 제주도인에게는 항상 빳빳하고 살에 붙지 않는 옷감이 필요하였다. 그러한 이유에서 감물염색이 생겼다. 염색법은 7, 8월에 풋감을 따서 으깨어 즙(汁)을 낸다. 이 즙이 옷에 완전히 흡수되도록 충분한 양으로 염색한 후 찌꺼기는 털어내고 옷 모양을 펴서 여름의 직사광선 아래에서 건조시켜야 한다. 열 차례 반복하여 건조시키면 짙은 적갈색(赤褐色)으로 염색이 되고 빳빳하게 풀먹인 옷같이 된다.

섬 주민의 식생활

도서지방의 특징적인 식품은 소금에 절인 염장식품일 것이다. 특히 전라남도의 여러 섬에서는 여러 가지의 염장식품이 생산되고 있다. 최근에는 냉동식품 · 냉장식품 · 통조림 등의 보급과 발달, 그리고 염분 섭취를 적게 하는 식생활의 변화로 차차 염장식품, 특히 젓갈류의 소비가 줄어들고 있으나 아직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젓갈이라는 것은 주로 소어류(小魚類) · 게 · 새우류 · 어류 내장 · 어두(魚頭) · 패류 등을 염장하였다가 삭으면 조미료를 가미하여 먹는 섬지방 주민의 주요한 부식이다. 젓갈은 재료와 담그는 방법에 따라 맛이 달라지며 소금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원래 젓갈은 2, 3년 묵혔다가 먹는 것이 좋고, 아주 좋은 것은 5년 이상 묵혔다가 먹는 수도 있다.

섬지방에서 많이 이용하는 생선의 염장법에는 마른간법과 물간법 및 특수염장법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방법은 마른간법과 물간법이다. 마른간법은 주로 지방질이 적은 대구 · 조기 등을 염장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으로 어체(魚體)에 직접 소금을 뿌리는 방법이고, 물간법은 적당한 농도의 식염수에 어체를 담가두는 방법이다. 염장식품 종류로는 간조기 · 오징어 염장 · 염장 미역 등이 있다.

젓갈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식품으로서 지방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다. 해역별로 대표적인 젓갈명을 들면 동해안의 명란젓 · 오징어젓, 남해안의 멸치젓 · 굴젓 · 갈치내장젓 · 조개젓 · 꼴뚜기젓 등이 있다. 그 중에 생산량이 가장 많은 것은 서해안의 새우젓과 남해안의 멸치젓이다.

과거에 다도해의 여러 섬에서는 주식이 고구마보리였다. 현재는 도서 인구의 감소와 소득 증대 및 다수확 품종의 볍씨 보급으로, 주식이 쌀로 변하고, 밭에는 고구마 · 보리 대신에 특용작물인 마늘을 많이 심고 있다.

섬 주민의 주생활

섬지방을 중심으로 민가형을 살펴보면, 전라남도의 남서 해안 · 도서지방 · 영산강 연안에는 홑집인 중앙부엌형 민가가 주로 분포하고, 제주도에는 겹집인 3실형민가(三室型民家)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울릉도에는 홑집 형태의 누목형민가(累木型民家)인 투방집이 독특한 경관을 이루며 분포했었다.

투방집은 풍부한 나무를 사용하여 너와를 지붕 재료로 사용하였고 눈 · 비 · 햇빛 · 바람 등을 막기 위하여 우데기를 설치하였다. 이 중 가장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다도해의 민가 중에서 완도군 청산도(靑山島)의 예를 들어 주생활을 살펴보면 민가의 평면은 4칸집이 대부분이고 극소수가 3칸집이다. 대지 내의 주요 건물은 큰채와 행랑채이다.

큰채의 주요 평면 구성 요소는 큰방 · 부엌 · 모방 · 마리 등이다. 4칸집의 평면 구성 요소는 큰방 · 뒷방 · 마리 · 김치고방 · 모방 등이다. 마리에는 곡물을 저장하는 큰 항아리가 여러 개 있으며, 큰방 뒤에 있는 뒷방은 고구마를 저장하는 곳이다. 마리와 큰방 앞에는 토지라 불리는 툇마루가 있다. 부엌은 취사장이며 큰방과 모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모방은 며느리가 사용하고 있는 안방이며 모방 뒤의 김치고방은 김칫독을 두는 곳이다. 3칸집은 원래 4칸집이었으나 부엌과 접속된 모방 부분이 도괴(倒壞)된 것이다.

도서 민가의 내부 공간과 기능을 살펴보면 큰채의 구성 요소인 마리의 주요 기능은 3, 4대조까지의 조선(祖先)의 지방(紙榜)을 모시고 또 민가의 수호신인 성주동우라는 가택신을 모시는 곳이다. 매년 가을에 햇곡이 나면 성주동우에서 구곡(舊島)을 쏟고 햇곡으로 갈아 넣는다. 성주는 모든 가택신 중에 가장 어른신이며 명절이나 제사일에는 먼저 성주신에게 고하고 조상에게 상을 차린다. 마리의 또 다른 기능은 곡물의 저장고이다. 곡물을 넣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항아리가 마리에 놓여 있다. 그리고 마리에서 여름철에 취침을 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큰방은 부엌과 마리의 중간에 있는 방이며 부엌 쪽의 벽에 벽장이 있고 침구나 가재를 얹어둔다. 큰방은 가족 중에서 가장 연로한 부부가 차지한다. 즉 조부모가 생존해 있으면 생활 능력이 없더라도 큰방을 차지한다. 조부모가 모두 죽었을 때 작은방이나 모방에서 기거하던 다음 세대의 부부가 큰방으로 이전한다.

장자가 혼인하면 신부와 함께 모방이나 행랑채의 작은방을 사용하는데 이같이 며느리가 사용하는 방을 안방이라 한다. 이곳은 출입이 비교적 제한된 공간이다. 부엌은 큰방과 모방 사이에 위치하므로 두 방에 불 지피기가 편리하다. 이러한 위치를 가지는 부엌은 전남의 다도해 도서와 남 · 서 해안 및 영산강 연안 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어 남방 문화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큰방 쪽으로는 밥솥과 국솥이 걸렸고 모방 쪽으로는 작은 솥이 걸렸다. 부엌의 기능은 취사가 주이나 우천시에는 간단한 작업 공간이 되기도 한다. 큰방 쪽 벽 중간에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청수(淸水)를 떠놓는 사발이나 종지를 놓아두는데 이것이 조왕이다. 조왕은 부녀자들이 정성들여 모시는 가택신이다.

모방은 4칸집에서 부엌의 우측에 있는 방인데 3대가 같이 거주할 때 손자며느리가 사용하는 방이기도 하고 때로는 며느리가 사용하기도 한다. 이같이 며느리가 사용할 때 안방이라 칭하기도 하며 공부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행랑채는 큰채에 비하면 부속 건물에 해당하며 주요 내부 공간은 작은방 · 웃방 · 방애청 · 헛청 · 외양간 등이다.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가옥의 배치형은 큰채와 행랑채가 분동으로 된 ㄱ자형이다. 대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담은 그 재료가 대부분 잡석(雜石)이다. 도서지방은 사계절 바람이 많기 때문에 담의 높이는 일반적으로 지붕의 처마끝 정도로 높다. 마당은 농산물의 건조장 및 작업장으로 사용하고, 집 뒤안에는 넘새밭과 장독대가 있다.

섬의 민가는 자연환경에 적응하여 발달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근래에는 현대식 개량 주택이 점차로 보급되어 그 가옥 구조가 육지와 가까우며 규모가 큰 섬에는 전통 가옥과 개량 주택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섬 주민의 교통과 통신

섬은 환경적 특성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고, 교통 수단도 해상의 선박에 의존하게 된다. 1994년 기준 유인도 464개 가운데에서 여객선이 취항하는 섬은 328개로 60.5%이고, 미취항섬은 183개나 된다. 그 가운데 여객선이 매일 취항하는 섬은 207개, 격일 취항섬은 60개, 3일제 취항 섬은 14개이다.

해상교통의 불편은 낙도일수록 심하며, 여객선의 규모가 작고 노후 선박이 많아서 폭풍주의보만 발령되어도 취항하지 못하는 불편이 있다. 섬 중에는 주위의 수심이 얕아서 해안에 여객선을 접안하지 못하고 전마선으로 여객을 섬까지 수송하는 경우도 많고, 또한 선착장 및 방파제가 없기 때문에 여객선을 섬에 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전천후 여객선의 개발 및 헬기의 취항이 필요하다. 또한 명령항로를 더 많이 지정해서 모든 유인도에 여객선이 취항하도록 개선해야 한다.

섬의 자원과 이용

우리나라의 도서지역에는 경제적 가치가 높은 자원들이 산재해 있으며 그 일부가 이용, 개발되고 있다. 도서지역에 산재된 주요 자원으로는 인근의 해양 공간에 분포한 양식업 · 수산업 · 염전 등을 중심으로 한 수산자원, 일부 섬에 분포하고 있는 규사 · 고령토 · 동 · 아연 등의 지하자원, 특용작물을 비롯한 농업 생산물과 최근에 더욱 부각되고 있는 섬의 문화유적 및 수려한 해상경관으로 이루어진 관광자원 등을 들 수 있다.

도서지역의 지하자원으로는 약 40여 종의 광물이 분포하고 있고, 이들 광물 중 납석 · 규석 및 규사가 매장량의 55%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광물별 분포 지역을 살펴보면, 백령도의 철 · 석회석, 신안군 도초도 · 비금도 · 압해도의 사금 · 규사 · 납석 · 석회석 · 철광석, 완도군 일대 도서의 고령토 · 규사 · 엽납석(葉蠟石), 진도군 조도의 다이아스포아 · 황철석 · 천청석(天靑石), 신안군 일대 도서와 군산시 선유도 · 보령시 월산도의 사금 · 사철 · 질콘늄 · 세늄 · 티탄철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전라남도의 무안과 신안 등의 해안과 해저에 분포하고 있는 규사는 반도체의 원료가 된다. 그리고 서남 해안에 만곡의 해안선과 도서에 연하여 전 국토 면적의 4%가 넘는 약 4천㎢의 간척지 조성이 가능한 천해의 해저에는 경제적 가치가 큰 광물자원 및 골재자원(骨材資源)이 막대한 양으로 부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남서 해양의 대륙붕 3 · 4 · 5광구에서도 석유와 천연가스의 부존 가능성이 높다.

도서지역은 입지의 특성상 다양한 수산자원을 보유하고 있는데 개발, 이용되는 것으로는 연 · 근해어장을 중심으로 한 어업 · 양식업 · 수산제조업 및 제염업 등을 들 수 있다. 연 · 근해의 주요 어장으로는 연평도어장 · 고군산군도어장 · 청산도어장 · 나로도어장 · 칠산도어장 · 서거차도어장 · 흑산도어장 · 장승포어장 등으로서 삼치 · 조기 · 문어 · 전갱이 · 새우 · 민어 · 고등어 · 갈치 등 70여 종에 달하는 어족이 어획된다. 한편 어류 · 패류 · 해조류 등의 천해 양식업이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다.

완도 · 고흥 · 강진 · 무안 · 여수 등을 중심으로 한 김 양식과 전라남도의 해창만과 섬진강 하구, 부산의 가덕만과 경상남도 진교만 부근의 집약적 굴 양식이 그 대표적인 양식업이다. 그 밖에도 미역 · 꼬막 · 백합 · 바지락 · 전복 등의 패류 및 해조류의 양식업이 매우 활발하다. 그리고 건제품과 염장식품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수산가공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신안 · 서산 · 무안 등지의 도서지역에는 많은 염전이 조성되어 천일제염업이 행해지고 있다. 도서지역의 농산물 및 특용작물은 답작에 의한 농산물의 생산보다는 전작에 의존한 경제성작물(經濟性作物)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주요 경제성작물로는 유채 · 참깨 · 땅콩 등을 들 수 있으며, 파 · 시금치 · 참외 · 마늘 등의 원예작물도 생산되고 있다.

특화작물의 분포를 살펴보면, 다도해의 대부분의 도서에서는 유채를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덕적군도의 고구마, 안면도의 땅콩, 조도군도의 고구마 · 양파, 보길도 · 노화도의 마늘, 도초도 · 비금도 · 압해도 · 지도의 고구마 · 마늘 등을 들 수 있다.

도서지역은 유 · 무형의 유적 및 유물 문화재를 비롯하여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많은 해상경관의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도서지역에 분포하는 주요 문화적 관광자원은 다음과 같다.

강화군 교동면 교동도(橋桐島)에는 1629년(인조 7)에 축조한 교동읍성(橋桐邑城)교동향교(橋桐鄕校)가 있고 석모도(席毛島)에는 635년(선덕여왕 4)에 창건된 보문사(普門寺)가 있으며 이곳에는 특히 나한전(羅漢殿)이라 불리는 석실과 낙가산(洛迦山) 중턱에 위치한 마애석불좌상이 유명하다.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위도(蝟島)에는 조선 중기의 건축물이며 지방 유형문화재인 위도관아(蝟島官衙)가 있다. 전라남도 지역의 문화적 관광자원으로는 주로 이순신과 관련된 유물 · 유적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목포시 충무동과 진도군 · 여수시 일대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한편, 신안군 도초면 도초도 용담산 기슭에 위치한 만년사(萬年寺), 신안군 압해읍의 선돌, 여수시 화정면 백야도의 백야산성(白也山城), 여수시 삼산면 이죽도(異竹島)의 이대원장군사당(李大源將軍祠堂) 등이 주요 문화적 관광자원을 이룬다. 도서지역은 수려한 해상경관과 기암괴석이 하나의 해상공원을 이루고 있어 섬 하나하나가 모두 주요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도서지역의 대표적인 국립공원으로는 태안해안국립공원, 홍도(紅島) · 조도(鳥島) · 백도(白島)를 중심으로 한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한려수도의 여러 섬을 중심으로 한 한려해상국립공원 등이 있고 이밖에 많은 도립공원과 지정 관광지를 보유하고 있다.

주요 해수욕장으로는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도(龍游島)을왕리해수욕장과 용유팔경, 옹진군 덕적도서포리해수욕장과 덕적팔경, 충청남도의 당진시 대난지도(大蘭芝島)의 난지도해수욕장, 보령시 원산도(元山島)의 원산도해수욕장, 전라북도의 군산시 선유도(仙遊島)의 명사십리로 유명한 선유도해수욕장과 인근의 망주봉 · 무산십이봉의 절묘한 산악경관, 부안군 위도의 위도해수욕장 등이 있다.

또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중심 관광지이며 최근 많은 관광객이 찾는 전라남도 홍도의 수려한 해상경관, 매년 음력 2월 그믐과 3월 그믐 사이에 2.8㎞의 바닷길이 갈라져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진도군 모도(茅島), 관매팔경과 관매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진도군 관매도(觀梅島), 35개의 유인도와 145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고 기암괴석이 절경인 진도군 조도육군도(鳥島六群島), 윤선도의 유적지와 중리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완도군 보길도(甫吉島), 금당팔경으로 유명한 금당도(金塘島), 그리고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중에서도 백사청송(白沙靑松)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유한 고흥군 나로도(羅老島), 온 섬들이 기암괴석과 함께 온통 흰 바다를 이루고 있는 거문도(巨文島) · 백도, 돌산대교 · 만성리해수욕장과 함께 동백꽃으로 유명한 한려해상국립공원 상의 오동도(梧桐島)와 인근에서는 소금강으로 불리는 향일암(向日庵) 등이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는 경상남도의 남해대교상주해수욕장, 남해도 금산의 38경, 거제도 해금강의 기암괴석의 절경과 한산도(閑山島)제승당과 남망산공원(南望山公園) 등이 있다.

우리나라 섬주민의 생활과 섬의 개발은 앞으로 발전될 여지가 많다. 첫째, 섬 주변의 해양은 천해(淺海)이며, 조류 및 적당한 수온, 영양염류의 유입 등으로 천혜의 어장을 형성하여 각종 어류가 풍부하고, 해조류 · 패류 등의 양식에 적합하여 김 · 미역 · 다시마 등과 조개류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둘째, 아름다운 섬의 자연과 맑고 깨끗한 바다와 공기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소득이 높을수록 휴양과 레저공간으로서의 해양의 비중이 높아져서 바다에서 낚시를 즐기고, 여름에는 해수욕장을 찾고, 섬에 별장을 만들어 휴식을 갖고자 한다. 교통을 보다 편리하고 안전하게 하고 관광지로 개발하면 다도해의 여러 섬은 여름에는 피서지로, 겨울에는 피한지로 사철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셋째, 섬의 위치에 따라서 어업 전진기지로 개발해서 연 · 근해에서 어로 작업하는 어선에 유류 · 얼음 · 식수 등을 공급해주고, 어획한 수산물을 가공 처리하는 공장 건설도 기대할 수 있다. 넷째, 어촌 자원을 지역 여건에 맞게 개발하여 어민의 소득원을 다양하게 높이고 쾌적한 어촌 정주 생활환경을 조성하여 인구 유출을 막아 섬의 자생적 발전력을 회복해야 한다. 끝으로, 대륙붕에서 석유자원이 개발된다면 섬에는 정유소가 건설되고 파이프라인이 본토와 연결되어 동력자원의 주요 공급지로서 개발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섬주민들은 숙원 사업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전력 공급을 원하는 섬이 있다. 가전제품을 이용하고, 텔레비전의 시청 등을 원하지만 전기가 없어서 낙후된 생활을 하고 있는 섬도 있다. 대부분 50호 이상의 유인 도서는 대부분 전력이 공급되고 있지만, 50호 이하의 도서는 자가 발전 시설에 의존하기 때문에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둘째, 1994년 기준 53개 섬에 병원 및 진료소가 있으나 보건진료소의 질적 · 양적 확대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급한 환자가 발생했을 때 쾌속선이나 헬기로 신속하게 육지 병원으로 후송하는 제도와 진료소가 없는 섬에 주기적으로 병원선이 순항하는 제도를 원한다.

셋째, 식수 문제의 해결이다. 섬에 따라서는 풍부한 지하수 개발로 간이 상수도를 시설한 섬이 있지만 그러한 섬은 전체 중 41.9%로 안전 급수율이 47.2%에 불과하다. 아직도 우물과 펌프에 의존하는 비율이 52.8%나 된다. 그러므로 위생적인 식수 공급과 개량된 주택 보급으로 생활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

넷째, 교육 문제이다. 아직도 학교가 없는 도서가 많이 있다. 도서는 지역적으로 격리된 곳이고 주민의 수가 적기 때문에 분교 및 분실의 시설 개선과 확충이 요구되고 있으며, 교육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복식 교육의 모형 개발이 필요하다. 그리고 도서지역에 근무하고 있는 교사를 우대하여 교사로 하여금 교육에 전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도시 학교와 자매결연을 장려하여 섬 학생들이 일 년에 한 번 이상 도시에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중학교가 없는 섬에는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병설하여 섬에서 중학교육까지 의무교육으로 마칠 수 있게 배려하여야 한다.

끝으로, 교통 문제이다. 여객선의 운항 횟수를 증설하고, 쾌적한 여행이 될 수 있게 선박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 섬주민도 본토의 주민처럼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정부에서 투자를 집중하여 장기적으로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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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장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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